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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도 耕織圖
동양 인물 풍속화의 한 화제(畵題). 농민의 부지런함과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임금에게 알리고, 임금이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업에 대한 정책을 힘쓰도록 촉구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일종의 권계화*(勸戒畵)로 왕실의 교육에 이용되었다. 남송南宋의 화가인 누숙樓璹(로우 즈우)이 고종高宗에게 진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절강성浙江省의 현령을 지낸 누숙은 빈풍칠월도*에서 힌트를 얻어 경직도를 그렸다고 한다.
농업과 잠업(蠶業)의 일을 시기 순으로 묘사한 경직도와 잠직도(蠶織圖)를 경직시(耕織詩)와 함께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직도에는 농사를 짓는 21개의 장면이 묘사되고, 잠직도에는 베짜는 24개의 장면이 표현되어 총 45폭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각각 오언시(五言詩)를 붙이는데,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이후 많은 경직도가 그려졌는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를 모본으로 제작된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가 가장 유명하다. <패문재경직도>는 청淸나라 강희 연간(康熙, 1662~1722) 때인 1696년에 초병정焦秉貞(자오 빙즈엉)이 투시원근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한국에는 조선 중기인 1498년에 <누숙경직도> 모본이 전래되었다고 추정된다. <패문재경직도>는 18세기 초엽이나 늦어도 중엽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경직도로는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논갈이> 등의 경직도와 작자미상의 <경직도>(독일 게르트루드 클라센 소장) 등이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 중에 종종 보이는 논갈이, 베짜기, 실감기 등의 장면은 경직도에 그 연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계화 界畵
건물, 배, 수레 등을 소재로 자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정밀하게 그리는 것 또는 그 기법. 본래 실용적인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장인적이라고 하여 낮게 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점, 하나의 필획(筆劃)일지라도 자나 컴퍼스와 같은 도구에 의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리는 대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요구되기 때문에 학습이 필요한 분야다.
그 역사는 진대(晋代)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를 거쳐 수대(隋代)에 그 양식이 본격화되었다.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동원董源(똥 위앤), 또 북송北宋의 곽충서郭忠恕(구어 쫑쉬),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처우 잉)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당대(唐代)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의 벽화에도 실례가 있으며 송대(宋代)의 〈황학루黃鶴樓〉 〈승왕각도勝王閣圖〉 등이 전한다.
계회도 契會圖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문인들의 계모임(契會)을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에는 관아(官衙)의 동료나 과거의 동년(同年) 등이 명승지나 서당에서 계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기념하거나 기록하기 위하여 그 장면을 도시(圖示)했다. 특히 표제(標題)와 인적사항을 적은 좌목(座目)을 첨가하고 있다. 계회도는 옛날 문인들의 문화와 생활의 여러 단면을 그리고 있어 풍속적인 경향이 강하다. 전통문화 내지 회화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 미술 高句麗美術
기원전 2~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약 700여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걸쳐 나타난 미술. 만주에 터전을 잡은 고구려는 중국과 화북 지방뿐 아니라 북방 이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역 및 남시베리아의 영향을 많이 수용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낙랑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또 그 고지를 점령한 관계로 낙랑 미술*의 전통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남쪽으로 퍼뜨리는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그 묘제 미술과 불교 미술은 백제, 신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건축:고구려의 건축은 도성(都城), 궁궐, 사찰, 살림집 등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예가 없어 현재까지 알려진 궁궐터와 절터의 발굴 조사 및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건물의 그림, 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궁궐터로는 통구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그리고 장안성長安城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궁궐터 주변에는 전시(戰時)나 유사시에 피난, 방어를 목적으로 한 산성으로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국내성)과 대성산성大城山城(평양)이 있었는데, 이는 도성제(都城制)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근년에 조사된 안학궁터는 한 변이 623m나 되는 마름모형 성벽 안에 남북 선상으로 북궁, 중궁, 남궁과 여기에 대칭 형식으로 동궁과 서궁이 배치된 대건축군과 정원 및 후원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궁의 정전(正殿)은 정면57m, 측면27m로 그 규모가 장대하다.
현재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절터로는 평양 동북부의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와 대동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등이 있어 고구려의 가람* 배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청암리사지는 팔각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의 삼면에 금당(金堂)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 배치인데, 일본 최고의 사찰인 아스카테라飛鳥寺(596년 완성)의 건립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전각과 부속 건물 등을 묘사한 것이 많아서 당시 존재했던 일반 건축의 세부와 배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팔각주, 방주, 원주 등의 기둥과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 그리고 치미와 수막새 기와장식, 인자형(人字形) 대공*(臺工)과 동자주(童子柱)의 설치 등 근세까지 건조된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 유사한 매우 발달된 건축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평북 시중군時中郡 노남리魯南里와 북창군 대평리, 만주 집안 동대자 등에 당시의 집터가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시중군의 것은 주변에서 한 점의 기와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민층의 주택으로 보여지는데, 동서로 늘어선 네 개의 기둥구멍과 ㄱ자로 꺾인 두 개의 긴고래 온돌시설이 중요한 자료이다.
조각:현재까지 전해지는 고구려 조각의 유품은 극히 소수로 불교 조각이 중심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경문(經文)과 불상을 가지고 옴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다. 불교의 주된 예배 대상인 불상도 이미 4세기말부터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5세기까지 그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있는 고구려의 불교 조각은 아직 없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불상 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예는 〈연가7년기미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己未年銘金銅如來立像〉으로 광배* 뒤의 명문*과 그 양식으로 보아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중국 북위北魏나 동위東魏 초의 불상 양식을 보이면서도 고구려 특유의 소박하고 강직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출토의 〈신묘명금동불입상辛卯銘金銅佛立像〉과 평양 평천리平川里 출토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있는데, 후자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 초기의 예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주목된다. 또한 평양 부근의 원오리元五里 출토의 〈니조불보살상군泥造佛菩薩像郡〉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드럽고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6세기말에서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말기의 불상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는데, 이런 사실은 그 당시 도교가 국가적으로 유행되면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석조 조각으로 평양 부근 영명사지永明寺址 계단 석돌에 조각된 돌사자의 예를 볼 수 있다.
회화:고구려의 회화는 현재까지 알려진 통구와 평양을 중심으로 분포된 60여기의 고분벽화로서 알 수 있다. 특히 고분벽화 내용의 주제와 화풍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천된 추이를 비교적 잘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고분벽화는 묘주(墓主)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풍속화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졌는데, 신분에 따른 인체 비례와 초보적인 요철법*의 표현은 고졸한 면이 나타나면서 고구려 특유의 동적(動的)인 화풍이 드러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安岳3號墳(357)과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409)은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의 귀중한 예이다. 6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기에는 풍속도가 유행하는데, 통구의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角抵塚이 이 시기에 속한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6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고분에는 사신도가 주로 다루어진다.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강서대묘江西大墓,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고분군, 오회분사호묘五恢墳四號墓 오회분오호묘五恢墳五號墓에서는 동적이며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를 띤 고구려 특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고구려 회화가 일본 회화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과 쇼토쿠聖德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수장(繡帳)으로 고구려계의 화가들이 밑그림을 그린 〈천수국만다라수장天繡國曼茶羅繡帳〉, 석가모니불의 전생설화를 다룬 〈옥충주자玉蟲廚子(다마무시즈시)〉등의 작품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예:고구려는 석실묘의 묘제를 채택한 관계로 도굴이 많이 자행된 탓에 전해지는 부장 유물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공예미술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다. 관모는 고깔처럼 생긴 모양에 꼭대기에 새깃을 단 절풍(折風), 절풍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쓴 책왕이나 왕족이 쓴 관이 있다. 귀고리는 윗고리가 가는 세환식(細環式)과 태환식(太環式)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간 장식과 드리개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형식이다. 또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전해진다.
고딕 미술 Gothic Art(영)
유럽의 중세미술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로마네스크 미술* 다음에 나타난 양식을 말한다. 시기상 대략 12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또는 16세기 초까지에 해당하며 르네상스 미술*이 개화되기 전을 가리킨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딕미술은 12세기말부터 약 1세기동안 지속되었다. 고전적 성격을 띤 전성기 고딕에 반해서, 13세기말 이후에 그 성격이 뚜렷하게 변질되어 바로크적 성격이 강해진 것을 ‘후기 고딕’이라고 부른다. 후기 고딕 중 특히 1400년경을 중심으로 한 약 반세기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사실주의*에 이탈리아 화파의 영향이 섞인 궁정 취미의 우아한 회화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서구 전체로부터 프라하의 신성로마황제의 궁정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유행하였던 이 경향을 특히 ‘국제적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고딕미술은 원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족인 고트(Goth)인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된 미술사 및 비평 용어이다. ‘고딕’이란 용어는 초기에는 건축, 특히 성당 건축에서 그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장식, 조각*, 회화*, 공예* 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확산, 적용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는 각지의 대수도원의 역할이 컸으며 수도사들이 미술에 종사하는 일이 많았던 것에 비해서, 고딕 미술에서는 파리를 비롯해 도시의 궁전이나 공동체가 발주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미술가도 세속의 전문가가 주를 형성했다. 이 때문에 기술적 발달이 뚜렷하며, 조각이나 회화에서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사실주의 경향으로 변모되었다.
각 분야에서 나타난 고딕 양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축:건축은 고딕 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고딕건축에 있어서 그 기본 원리는 교차 늑재 궁륭*(rib-vault)의 사용이다. 이것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이미 나타났던 교차 궁륭*을 대각선을 이루는 늑골*, 측벽 아치* 및 횡단 아치로 보강한 것으로서 이 궁륭을 바깥으로부터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 소형의 경우 및 지방에 따라서 본당 측과 직각을 이루는 부벽*에 의해 보강한다. 이 구조는 궁륭의 하중이 측벽 전체에 걸리지 않고, 측벽아치를 버티는 기둥의 정점에 집중되므로 벽이 불필요해져서 창을 크게 만들 수 있으며, 석재가 절약된다는 이점이 있다. 한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의 반원 아치가 고딕에서는 첨두아치*로 되었다. 첨두아치는 외부 압력을 경감시켰고, 따라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을 만들기가 수월해졌으며, 넓이(직경)와 높이(반경)와의 상호관계가 일정한 반원 아치의 제약에서 벗어나 구조와 공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다루게 되었다. 또한 첨두아치는 또다른 고딕 건축의 특징인 플라잉 버트리스와 함께 형태상 상승감을 강조하는 미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은 1140년에 세운 생 드니Saint Denis 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과 부르주Bourges, 랑Laon 등이 있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 교구 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후기 고딕 시대에서는 늑골이나 창의 트레이서리* 등이 세분화되고 또 장식적이 되어 플랑보아이양 양식*(프랑스)이나 장식적 양식(영국) 등의 번잡한 양식, 혹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하학적인 수직 양식*(영국) 등을 낳았다. 또 성이나 왕후의 관저나 도시의 공회당 등 세속건물이 성행함에 따라, 실용건축으로서의 고딕 양식을 발달시켰다.
조각:고딕 조각은 특히 성당의 정면 문턱에서 발전하였다. 12세기 중엽의 조각은 건축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다가(사르트르 대성당, 포르타유 루아이얄) 점차 건축적인 원칙에서 탈피하여 자연주의적 원리에 의해서 스스로를 다루게 되었다(사르트르의 남북 문턱, 아미앵 등). 후기고딕 시대가 되면 조각은 흔들리는 축이나 강조된 볼륨 등에 의해서 건축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주며, 그것은 또한 단독 조각의 발달과도 병행되었다. 작품의 소재는 성전의 세계에서 취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기증자의 조각상도 만들었다. 또 대중의 계몽을 위한 인간상이나 종교적 정신과는 관계가 없는 괴기한 모습의 조각도 장식용으로 이따금 쓰여졌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랭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의 본질은 이상주의 및 자연주의의 특징을 띠고 있다. 고딕 조각은 아름다운 고전적인 균형을 지향하였으며, 로마네스크 조각의 상징주의적인 표현에 비해 자연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회화:고딕 회화의 발전은 양식상 조각의 그것과 일치한다. 13세기에 있어서 회화가 지니고 있는 의의는 조각의 그것에 비해 적으나, 고딕 성당 건축의 특수한 조건에 조응하여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또한 미니어처* 회화도 13세기 후반에 특히 프랑스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 도시와 성곽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예술과 문학의 새로운 유행은 로맨틱한 삽화의 산출을 자극하였다. 한편 패널*화는 제단 뒤의 칸막이로 제공되기 이전에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시작되었던 패널화가 실제로 일반화된 것은 14세기 두치오Duccio di Buoninsegna(1255~1319)의 <시에나 성당 마에스타>에서였다. 마르티니Simone Martini(c.1284~1344)의 <수태고지*> 역시 고딕 패널화의 특징을 지닌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타피스트리*가 14세기부터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성당 내부에서도 제실, 애프스* 주변이나 기둥 사이에 이용되었다. 특히 성당 건축의 벽면 장식으로 이용된 타피스트리는 걸었다가 바꿀 수 있는 벽화로서 후기 고딕의 왕후 귀족이 애호하였다.
한편 13세기경부터 타블로* 화(畵)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플랑드르, 독일 등의 제도시를 중심으로 저명한 작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플랑드르에서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1399~1460) 등을 위시한 화가들이 ‘중세의 가을’이 한창일 때 사실주의 회화를 극점까지 밀고 나갔다. 14세기초 지오토Giotto(1266~1337)에서 시작하여 15세기말 반 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Botticelli(1445~1510)로 집약되는 고딕 회화상의 발전을 정리해보면,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Gothic sway) 등을 이 시기의 주된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딕의 부흥 Gothic Revival(영)
건축에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내내 행하여진 고딕 양식의 부활. 영국에서 1755년경 스트로베리 힐Strawberry Hill의 월폴Horace Walpole(1717~1797)의 별저가 로코코화된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이래로, 낭만주의*적 취미로서 유행하였다. 특히 정원건축으로서 고딕 수도원들의 페허나 키오스크(kiosk, 정자)가 애호되었다.
19세기 초기부터 고고학적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영국에서는 1830년경부터 성당 건축이 통상 고딕식으로 세워지게 되었고, 점차 다른 유럽 국가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시청사, 병원, 철도역 같은 공공건축에도 적용되기 시작한 고딕 양식은 고전 양식의 부흥과 더불어 19세기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건축가로서는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과 퓨긴Augustus Welby Pugin(1812~1852)이 있고, 그들이 제작한 런던의 국회의사당(1840~1850)에서 전형적인 고딕 부흥의 예를 볼 수 있다. 이스트레이크Charles Locke Eastlake는 1871년 《고딕 부흥의 역사A History of Gothic Revival》라는 책에서 고딕 양식을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운동”이라고 언급하면서 이것이 “조형예술에서 순수하게 영국적인 운동일 것”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고려나전칠기 高麗螺鈿漆器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칠공예가 발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자개를 붙인 정교하고 화려한 나전칠기*의 제작이 성행했다. 나전기법을 보여주는 최고의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나전단화금수문동경螺鈿團花禽獸文銅鏡〉이고 고려시대 이전에는 나전칠기의 유물이나 기록이 없다. 나전칠기가 고려시대에 이미 발달한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였고 그것이 점차 숙련되어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양식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11세기에 문종이 요遼나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볼 수 있다. 또 1123년에 고려에 왔던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였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언급하였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의 특징은 흑칠 위에 나전(螺鈿), 대모(玳瑁), 은사(銀絲), 동사(銅絲)를 감입(嵌入)하여 무늬를 만드는 데 있다. 전복껍질을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한 박패법(薄貝法)은 중국의 당나라에는 없던 것이다. 또한 대모(玳瑁, 鼈甲)를 얇게 갈아 그 뒷면에 붉은 채색을 칠하여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복채법(伏彩法)은 고려 나전칠기의 중요한 기법이며 당唐나라의 나전에서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금속선의 사용으로, 중국의 유물이 희소한 반면 고려나전칠기에서는 당초문*의 덩굴줄기나 무늬와 무늬 사이의 경계선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주로 은선, 동선, 주석선이 쓰였다. 문양은 대개 국화문과 당초문*을 전면에 가득 밀집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며 귀족적 취향에 영합하여 정교하고 우아하다. 고려의 나전칠기 기법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금속선이 자개로 대치되고 문양의 구도와 대칭이 흐트러지고 여백도 많이 남기며 점차 대범하고 거친 표현의 회화적 의장(意匠)으로 정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