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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젤 페인팅 easel painting(영)
캔버스*를 받치는 대(臺) 역할을 하는 이젤에 올려 놓고 그린 그림을 말한다. 역사상 이젤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예는 이집트 구(舊) 왕국시절의 부조*에 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오늘날의 화가들이 사용하는 세 발 달린 이젤이 등장했다. 19세기에 이젤은 일종의 가구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바퀴가 달린 경우가 많았고, 이는 그림의 고객들에게 화가의 권위를 인지시키는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스튜디오가 아니라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풍토가 정착되면서 접을 수 있는 가벼운 이젤이 개발됐다. 그러나 이젤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풍토는 추상표현주의* 시기에 와서 크게 위협받는데, 추상표현주의자인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은 그림을 이젤 위에 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젤 페인팅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화가들의 필수품이라기보다는 선택 사항이라 볼 수 있다.
이집트 미술 Egyptian Art(영)
주로 기원전 3000년 이후의 왕조시기에 이집트와 누비아의 나일강 계곡지역에서 제작된 기념비적 건축물과 회화, 조각, 공예품의 총칭. 이집트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준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집트 미술은 그러한 권력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미술의 특성에는 지리적인 요소가 지대한 작용을 했다. 나일강은 유리한 농업조건을 제공하여 미술과 공예가 발달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환경을 마련해주었으며, 사막과 바다로 보호되어 거의 2000년간 외국이나 타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막의 구릉에는 예술 활동의 재료가 되는 광물과 좋은 석재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으나 목재가 부족하여 레바논, 소말리아, 열대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척은 결국 이집트의 문명을 풍부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미술은 이집트 문화의 종교적 신앙을 반영하여 지상의 삶은 내세의 영생에 비하면 잠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고에서 출발했다.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세에 자신들이 지니고 갈 유용한 장식물들을 수집했으며 매장과 장례에 최대의 관심을 쏟았다. 이제까지 전해오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무덤과 결부된 것들이다.
(1)선왕조시대-이집트 제1왕조가 성립하기 이전까지의 시기(기원전 2925년까지). 암벽화, 무늬토기, 점토인형, 화장용구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도기는 이 시기의 특유한 산물로서 세련된 기법과 대담한 장식의 발전을 보인다. 석재를 이용한 작업은 선왕조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조각은 작은 동물상이나 원래 눈화장 용구로 쓰였던 석판 팔레트의 부조장식 따위에서 출발했다. 드로잉과 회화기법은 상(上) 이집트 암벽화에 나오는 동물화라든가 배 타는 장면, 사냥장면과 아울러 더욱 세련된 히에라콤폴리스의 무덤벽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2)왕조시대-기원전 3100년경 상(上)이집트와 하(下) 이집트가 통합된 것을 계기로 이집트 문화의 다양한 흐름이 모여 단일문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초기왕조시대(기원전 2925~2575년경)의 가장 유명한 미술품은 ‘나르메르왕의 팔레트’로서, 왕이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그려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하고 있다. 이 부조는 개별장면을 선명하게 처리하고 파라오를 신성하게 표현한 점에서 오랜 기간 이집트 미술에 나타나는 인물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는 옆모습으로 그렸으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가 정면을 향한 반면 상반신은 절반 정도 옆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또다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사실적인 표현을 포기한 미술가의 주된 의도는 한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고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모습, 즉 인간 형상의 부분들을 가장 잘 표현해내기 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고 있으며 인물의 크기를 달리해 상대적인 신분의 차이를 표시했다. 문화적 응집력이 높았으므로 이러한 관행들은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이른바 아마르나 양식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①고왕국시대-고왕국시대(기원전 2575~2130년경) 이래로 죽은 자가 거주하는 무덤과 신이 거하는 신전에 석재가 쓰이기 시작했다. 나일강의 진흙을 구워 만든 진흙벽돌은 선왕조시대부터 이미 일상적인 건축재료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요새나 신전 경내 및 도시의 성벽, 왕의 거처나 신전 부속건물 등에도 쓰였다. 고대 이집트의 성읍은 대부분 나일강의 범람원에 위치했으므로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다소 떨어져 있는 신전이나 무덤이 주로 보존되어 있다. 이집트의 묘소 건축은 대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대규모 피라미드를 짓고 그 안에 군주의 시신을 보관하는 방을 두고 주변에는 여러 무덤과 신전으로 이루어진 건물군을 배치했다.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의 2대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알려진 것 중 최고(最古)의 것이다. 이것은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6층의 계단을 포개 올린 형태이며 내부에는 사각으로 석회석을 붙인 성벽을 둘러 그 안에 왕궁과 같은 모조 건축물을 지어놓았다. 가자에 있는 유명한 대건축물들은 피라미드 건축의 고전적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146.7m의 제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가장 걸작이다. 토대를 이루는 정사각형의 면적이 5.3ha에 달하면서도 각 변의 길이는 30cm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4면의 방향은 동서남북에 정확히 일치한다. 받침돌을 대어 높이 올린 대열주와 압력을 줄이기 위해 위층에 5개의 빈 방을 올린 화강암 왕실도 특징적이며 왕의 두상과 사자의 몸통으로 조각된 대형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귀족들의 무덤은 왕의 것과 다르게 진흙 벽돌이나 석재로 지은 꼭대기가 평평한 직사각형의 구조물로서, 아랍어로 ‘긴 의자’라는 뜻의 마스타 바*라 불렀다. 거대한 상부에는 많은 창고가 마련되어 사자(死者)를 위한 식량과 비품들이 저장되어있고 시신은 땅 밑의 직사각형 매장실에 안치되어 있다. 고왕국의 석조무덤과 신전은 이집트 인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밝은 채색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뛰어난 것은 평부조 작품으로 제5왕조의 왕실무덤 건축물과 멤피스 묘역의 제5, 6왕조시대 개인무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부지르에 있는 네우세레왕의 태양신전부조와 사카라의 프타호테프 및 티이왕 무덤에 새긴 일상생활 장면들도 뛰어나다. 이 시기에 조각 인물상을 묘사하는 규범이 세워져 정확한 비례와 자세, 세부의 배치 등이 규정되었다. 군주와 관리들은 항상 지위에 걸맞은 위엄 있는 태도로 묘사되었으며 하인과 일꾼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보다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규범은 양식의 지속성과 기법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②중왕국시대-고왕국 말기에 내란과 경제 침체로 정교한 무덤건축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적 질이 저하되었다. 예술의 부흥이 이루어진 것은 정치가 안정된 중왕국시대(기원전 1928~1600년경)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왕들의 초상조각이 주목을 끄는데 고왕국시대 인물상의 위엄있는 무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근심이나 비애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파이윰 오아시스 부근의 피라미드와 신전들의 규모는 더 작아졌고, 주로 말린 벽돌과 석재포장을 사용했다. 그러나 특히 부조와 회화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부조작품은 테베의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과 카크나크에 있는 세소스트리스의 작은 사원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인물과 문구를 배치하는 데에 여백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세련미를 한층 높이고 있다.
③신왕국시대 및 말기 왕조시대-다시 한 차례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뒤 신왕국시대(기원전 1567~1085년)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개화기가 도래했다. 신전, 사당, 암벽무덤, 명문비석 등이 나일강 계곡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 건립되었다. 왕실무덤들은 도굴과 훼손을 피하기 위해 산봉우리가 우뚝 솟은 테베의 궁벽한 골짜기에 모아 세워졌다. 이른바 ‘왕들의 계곡’에는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어 아무 외부 구조물 없이 다만 무덤 입구의 암벽 표면에만 표시해 놓았다. 암벽무덤은 귀족계급에서도 흔히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단순한 하나의 공간에 마스타바 무덤의 복잡한 방들의 역할을 모두 부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상당한 공을 들이기도 하였는데, 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회랑들은 종종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으며 회랑 내부에는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었다. 때로는 정면 현관에 주랑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겨 웅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신전건축은 크게 예배용 신전과 장례용 신전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일상적인 예배의 대상인 신상을 모신 곳이고 후자는 죽은 왕들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전의 내부시설과 웅장한 크기는 제사장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전건축은 거대한 현관과 열주*가 늘어서 있는 마당, 많은 기둥이 있는 회랑, 감실 및 예배당들을 포함했다. 신전 내부의 깊숙한 곳은 파라오와 대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기둥과 받침대의 디자인은 종려나 파피루스 같은 식물 모양을 본떴으며 벽도 식물문으로 장식했다. 주신전 밖으로는 호수나 우물이 있어 제례에 쓰는 물을 공급했다. 부속 건물을 망라한 전체 신전은 진흙벽돌로 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배용 신전은 오랜 세기에 걸쳐 테베에 세워진 대성전들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형식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착공한 룩소르 신전과 위대한 건축가인 람세스 2세가 지은 아부심벨 신전이 있다. 천연의 암석을 파서 지은 이 신전은 전반적으로 보통 이집트 신전의 설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전 정면에는 거대한 좌상이 위치하며 기둥이 있는 회랑 2개가 잇닿아 현관으로 통하고 감실에는 람세스 자신의 조상을 포함해 4개의 신상이 비치되어 있다. 제21, 22왕조의 왕들이 아몬 레 신에게 봉헌한 삼각주 지대 타니스의 대신전은 예배와 장례 모두를 위한 것으로서, 거대한 조상과 10여 개의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석조의 대부분을 이집트의 다른 신전들에서 차용해왔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건축들을 집대성한 듯이 보인다.
신왕국시대의 장례용 신전은 대부분 서부 테베의 변두리 사막지대를 따라 건축되었다. 한 가지 예외라면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으로, 다이르알바리의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 부근에 있다. 관례에 따라 설계된 장례용 신전 중 가장 대규모의 것은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으로 보인다. 이것은 주로 오늘날 남아있는 석영암으로 만든 두 개의 멤논의 거상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신전의 뜰과 회랑의 유적에서 발견된 이 거상들을 비롯한 왕실조각상들은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웅장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장례용 신전에서 외벽의 벽장식은 왕들의 군사활동을 다루었으며 내부의 장면은 제례적 의의를 갖는 내용이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들은 왕실과 그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한 사치품들의 전형이다. 회화는 이 시기에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잡았고 공예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제28왕조에 이르러 회화와 조각은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였으며 고전적 규범을 좀더 자유롭게 적용했다. 인물상은 가볍고 부드럽게 처리되었고 세부묘사도 정밀해졌다. 부조미술의 전통이 테베에서 부활되었으며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셉수트 신전 조각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집트 회화는 테베에 있는 귀족들의 무덤장식을 거쳐 최고조에 달했다. 장식매체의 특성과 확대된 예술적 자유로 오락적인 내용을 담은 세밀화*가 표준이 되었다. 테베와 텔엘아마르나의 왕궁과 주택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천장화의 단편들은 풀밭과 정원을 배경으로 한 상류계급 일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부각된 아마르나 양식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여 왕실가문의 성원들도 비공식적인 일상생활 속의 모습으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조각에 있어서는 비록 람세스 2세 치하에서 거상 조각이 절정에 달하고 뒤이어 아크나톤 치하에서 관능적 사실주의가 번성했지만 사실상 이집트 조각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의 왕실 인물상들은 관례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사자를 데리고 리비아인 포로를 옆에 끌고가는 람세스 6세의 특이한 인물상 같은 예외만 있을 뿐이다. 말기 왕조들의 왕실 조각과 민간 조각에서는 복고풍이 두드러지며, 중왕국과 제18왕조 시대 조각상의 유형이 부활되어 다양하고 뛰어난 기법으로 획기적인 사실주의를 구현한 테베시장 몬템하트의 조각상들 같은 걸작들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집트 조각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 앞에 재현하거나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대신전의 신들 앞에 재현(再現)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조각상은 물리적 재현이자 그에 부합하는 문서 보관도구이기도 했으므로 표면에 부조와 함께 문자가 새겨지기도 했다. 공예품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도기는 예술성이 거의 없고 단순했으나 제18, 19왕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무늬가 채색된 고급 기물이 등장했다. 광택이 있는 석영가루의 합성물인 파이앙스가 도기를 대신하는 재료로 등장해 왕조시대 전 기간에 걸쳐 작은 동물상과 인물상 등의 재료로 널리 쓰였고 특히 후기 시대에 파이앙스로 만든 부적과 작은 신상이 크게 발달했다. 유리는 선왕조시대 초기부터 유약의 형태로 알려졌으나 제18왕조때까지는 독립적인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항상 사치의 상징으로서 부적, 구슬, 상감, 술잔 등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이집트 금속공예의 장인들은 구리와 청동 및 금을 즐겨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용기는 금속덩어리를 나무로 된 모루 위에 놓고 두들겨 만들었으나 뒤에는 주물이 지배적으로 쓰였다. 대형 청동 주물상은 말기왕조시대(기원전 1085~322) 제25왕조 때까지 절정에 달했으며, 카로마마상이 유명하다. 이 여인상의 우아한 조형미는 겉옷의 깃털무늬와 정교한 꽃무늬, 옷깃을 이루는 금은 상감*에 의해 한층 돋보인다.
이집트에서는 은보다 금을 구하기가 수월했으며 상감과 칠보세공, 장신구 등에 널리 쓰였다. 또한 홍옥수, 자수정, 석류석, 벽옥, 청색유리, 장석, 터키옥, 마노 등 다양한 준보석들도 사용되었다. 제18왕조 시대의 우수한 장신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엄청난 물량의 나무와 상아, 동물의 뼈를 사용한 조각, 화장 용구, 금과 보석 세공은 모든 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주며 특히 왕의 매장실에 비치된 의자, 식탁, 평걸상, 침대, 옷장 등 조각과 상감을 새겨 넣은 가구들은 주목할 만하다.
(3)프톨레마이오스조(朝) 및 로마시대-기원전 395~332년경의 시기로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에서 동서 로마의 분열까지의 시대. 그리스, 로마 시대라고도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조의 통치 아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집트의 미술과 건축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양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면서 다소 흐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이집트(기원전 30~서기 642)의 관에 쓰인 초상화는 이집트 특유의 예술적 양식을 낳았으며 이로부터 새로운 회화양식이 생겨나 비잔틴 성상으로 이어졌다.
(4)그리스도교 시대(콥트시대)-토착 이집트인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것은 2세기 말경 부터이며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집트인을 콥트라고 부른다. 콥트 미술은 종교적 변화를 배경으로 이집트 미술사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성당과 수도원을 제외한 대규모 건축물은 세워지지 않았고 당시의 동방 그리스도교 미술, 특히 시리아로부터 뚜렷한 영향을 받아 장식성이 강한 토착적 스타일의 미술이 생겨났다.
(5)이슬람시대-아랍인의 이집트 정복에 의해 이슬람화가 시작되고 지방적 특색이 풍부한 이집트, 이슬람 미술이 전개되었다. 건축은 연와 모양이며 열주는 없고 첨두아치*, 아라베스크*, 쿠픽체의 비문 등에 이슬람적 요소가 명확히 드러난다. 목공에서는 고부조가 성행하고 별모양 장식이 출현했다. 직물, 금공, 수정공예의 발달도 뚜렷해졌다. 건축에서는 술탄 하산의 모스크와 카이트 베이의 모스크가 알려져 있다. 도기는 9세기에 시작한 러스터 기법이 최고로 발달하여 파이윰 도기도 출현하였고, 청자 등 중국도자의 모조품이 양산되기도 했다.
익공 翼工
공포*(栱包)의 일종. 공포의 구조형식인 주심포*(柱心包), 다포*(多包), 익공(翼工)계의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간결하게 꾸며진 형식이다. 주심포의 변형으로, 기둥 위에 공포를 짜올리지 않고 끝이 소의 혀 모양으로 새겨진 부재를 설치하여 장식효과와 함께 보*를 지탱케하는 형식이다. 익공의 수에 따라 초익공(初翼工), 이익공(二翼工), 삼익공(三翼工)으로 나뉜다. 익공형식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실제 익공계 형식을 사용하였던 가장 오래된 유구로는 강릉 〈오죽헌烏竹軒〉(1536)과 〈해운정海雲亭〉(1530) 등 조선 초기의 건물이 있다. 익공이라는 용어는 1796년(정조 20년)에 집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쓰여 있다. 익공계의 전형적인 형식은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내의 누정(樓亭)이나 행각(行閣) 및 부속건물, 침전(寢殿) 그리고 서원, 향교건물, 사찰의 부속건물 등 일반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소규모의 건물에 사용되었다.
익랑 翼廊 transept(영, 프)
십자형 교회의 팔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신랑*에 직각으로 위치하며 보통 성단소(聖壇所)와 애프스*와 구분된다.
→ ‘내진’ 도판 참조
익주명화록 益州名畵錄
3권으로 된 중국회화 품평서. 북송北宋의 황휴복黃休復(후앙 시어우후, 10세기말~11세기초)이 지은 것으로 《성도명화기成都名畵記》라고도 한다. 책 앞에는 경덕 2년(景德, 1005) 이전李畋(리 티앤)의 서(序)가 있다. 당唐 건원乾元 초(758)에서 북송 건덕 연간(乾德, 963~967)까지, 익주에서 본 화적(畵迹)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서촉西蜀 고찰의 벽화*가 많다. 각각 간략한 전기와 그림 및 예술작품에 대한 평을 서술하였다. 그림만 있고 이름은 없는 경우와 이름만 있고 그림은 남아 있지 않은 경우를 첨가하였다. 품평은 모두 58명의 화가를 일(逸), 신(神), 묘(妙), 능(能)의 사격(四格)으로 나누어 화가들의 예술적인 수준을 평가하였다. 묘격과 능격은 다시 상, 중, 하의 3품으로 나누어 세분하였다. 황휴복은 화가를 평함에 있어 일격을 가장 높은 품평 기준으로 삼아 문인화가의 심미관을 반영하고 있다. 일격은 법도나 색에 맞게 그리는 데 서투르며 필은 간략하나 형태가 갖추어져 있는데 저절로 얻어 본받을 수 없으며 뜻 밖에서 나온 것을 이른다. 이것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 일정함이 없는 것을 일(逸)이라 한다’는 당시의 문인화론과 일치하는 미학사상이다.
신, 묘, 능이라는 회화비평기준은 당의 장회관張懷瓘(즈앙 후에이꾸완)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 뒤에 주경현朱景玄(주 징시앤, 9세기 전반기 활동)이 일격을 첨가하여 사격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이후 황휴복은 사격 중 일격이 가장 높은 품평 기준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덧붙여 주목되었다. 아울러 황휴복이 기록한 이 책은 서촉의 회화예술과 화원(畵院) 연구에 관한 중요한 자료도 제공하였다.
인더스 문명 Indus civilization(영)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견된 인도의 고대 문명으로 약 기원전 2500년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5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가장 먼저 발견된 유적의 명칭을 따라서 하라파Harappā문명이라고도 한다. 주요한 도시 유적으로는 펀잡 지방의 하라파와 신드 지방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를 들 수 있으나 찬후다로Chanhu-daro, 코트 디지Kot Diji, 로탈Lothal 등 약 150개 이상의 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같은 지역의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발견된 유물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인더스 문명은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균일한 통일성을 보여 준다.
정연한 도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모헨조다로에는 대욕장(大浴場)과 곡물 창고, 일반 주택, 상점, 관청, 하수도 시설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대부분 건물의 아래층은 불에 구운 벽돌로 되어 있고 그 위의 1, 2층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에서는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20점 정도의 조각*과 약 2,000개의 인장(seals), 토기*, 테라코타*상(像)이 전해진다.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높이 17.5㎝의 석회암제 〈남자 흉상〉은 의복에 있는 삼엽형(三葉形) 무늬와 머리 장식 모양이 메소포타미아 조각과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라파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뛰어난 붉은 석회암제의 〈남자 토르소*〉도 발굴되었다. 그 외에 동제(銅製)의 〈춤추는 소녀상〉도 정교하게 표현된 조각품이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단일 종류로는 동석(凍石)으로 제작된 인장*이다. 크기가 매우 작은 인장에는 상상 속의 동물이나 황소,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 신, 나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상형문자*들이 쓰여 있으나, 그 뜻은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테라코타상 중에는 지모신상(地母神像)으로 생각되는 조야하게 만들어진 여인상이 가장 많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멸망했는데, 정확한 멸망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리안족의 침입이나 건조해진 기후 또는 장기간에 걸친 문명의 해체와 쇠퇴의 결과라는 여러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인도 미술 Indian Art(영)
인도 미술은 기원전 3000년 전의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되지만 기원전 1500~600년 사이의 베다시대는 《리그베다》를 비롯한 4개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등 여러 문헌의 내용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야* 왕조를 비롯하여 슝가* 왕조, 전기 안드라* 왕조의 미술은 불교 미술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은 쿠샨* 왕조의 통치하에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건축과 조각* 중심의 미술이 발달했으며 동시에 남쪽에서는 아마라바티*를 중심으로 후기 안드라 왕조의 불교 미술*이 발전했다. 인도 불교 미술의 절정기는 4세기 초~6세기 중엽의 굽타 시대*이다. 그 이후로 불교 미술은 쇠퇴하고 힌두교 미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굽타 이후 인도에서는 인도인에 의한 통일 왕조는 출현하지 못했으나 각 지역에서 여러 왕조들이 등장하여 힌두교 미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2세기 말 북인도 지역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술탄 왕조가 등장하여 인도-이슬람 미술*을 발달시켰다. 16세기 초에 등장한 무갈 제국은 페르시아계의 외래 요소와 인도 전통을 결합하여 인도 문화사상 또하나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한편 남인도에서는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Vijayanagar 왕조(1336~1565)와 나야크Nāyak 시대(17세기)가 이어졌다. 인도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를 비롯한 힌두교, 자이나교*의 종교 미술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 미술은 종교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로 전해져 각 지역의 문화 및 미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인도-이슬람 미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