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관조
미적 관조 美的觀照
ästhetisches Betachten(독)
라틴어의 ‘관찰하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미학*상의 용어. 미의식*의 한 측면으로 대상을 논리에 의하지 않고 직접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및 그 작용의 결과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예술 창작이 미의식의 능동적 측면인데 반하여, 미적 관조는 미적 향수*와 마찬가지로 미의식의 수동적 측면이다. 미적 관조와 미적 향수와의 차이는 전자가 대상의 직접적 수용활동인데 대해서, 후자는 전자의 작용을 전제로 하여 행해지는 간접적 수용이라는 점에 있다.
미적 관조는 자아와 대상과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며, 더욱이 그것은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을 전제로 하는 점에 있어서 인식론적 활동이나 실천적 활동과 구별된다. 이 무관심성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미적 관조를 오히려 미적 정관*으로 보는 경우도 많으나, 해석의 능동성을 강조한 사고방식도 있다. 관조는 본질상 자아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두는 데서 성립한다. 그것은 자아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대상을 수용하는 작용이며, 이 수용성으로부터 향수와 밀접하게 결합한다.
모든 미적 향수는 ‘관조에 있어서의 향수’이다. 그런데 미의식에 있어서의 관조는 소위 무관심성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미적 관조는 미적 정관과 거의 동일하다. 일반적인 용례에 따르면, 관조의 대상은 본래 가시적인 것이지만 미의식에 있어서는 관조의 대상을 이렇게 좁게 제한시킬 필요가 없다. 대상이 어떠한 것이든 그 충실상을 수용하는 것이 미적 관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과 같은 가청적 대상이 미적으로 관조될 수 있음은 물론, 음악에 의해 유발되는 기분 등도 직접 체험함으로써 충실하게 생동하고 있는 한, 그들을 향해 의식이 집중하는 곳에는 일종의 미적 관조가 성립될 수 있다. 그것은 감각적 직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넓은 의미의 직관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관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만 관조의 개념이 조형예술에 보다 많이 적용되고 있는 것은 그 본래의 어의로 보아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관조라는 말은 감상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감상도 관조나 향수와 마찬가지로 수용적 미의식을 가리키지만, 이는 주로 예술의 경우에 적용되며 특히 대상에 대해 적극적인 가치 인식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엄밀한 미학의 용어로서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다.
칸트Immanuel Kant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이래로 근대 미학에서는 관조를 예술작품이나 미적 현상들에 대한 고유한 미적 지각으로 간주한다. 관조에서는 사물의 장소, 시간, 이유, 목적에 대한 일상적인 관찰이 차례로 중지되면서 사물의 순수한 본질이 직접 파악되는데, 따라서 정신은 스스로를 망각한 채 직관 속으로 침몰하여 목적도 고통도 시간도 없는 순수한 인식 주체가 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관조에 대한 고전적인 정식화이다. 한편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관조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요청을 아폴론적 예술의 세계로 환원시켜 미적 관조의 순수한 감수성을 ‘여성적 미학’이라고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