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조 미술
상왕조 미술 商王朝美術
상商왕조의 수도인 은허殷墟(현 安陽)는 기원전 1400년경 반경盤庚에 의해 세워졌으나 그 후 주周에 의해 기원전 11세기 후반에 정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양의 청동기는 고도로 발전된 것이며, 당시 금속공들이 만든 제기류 등은 이미 그 이전 수세기에 걸쳐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갑골문*에는 반경 이전 18명의 왕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으며 수도를 다섯번이나 옮긴 뒤에 마침내 안양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이들 수도들이 증명된다면, 전설상으로만 존재하는 신석기말에서 안양의 청동기 문화 사이의 공백이 밝혀질 것이다.
건축:19세기말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의 소둔 일대에서 상대(商代) 후기의 도읍지인 은허가 발견되고 다시 1950년대에는 정주 이리강에서 상, 중기의 도성터가 발견되었다. 1960년대에는 언사 이리두에서 전당(殿堂) 유적이 발견되었다. 전당지는 동서 108m, 남북 100m로 흙을 쌓아올려 굳힌 토단(土壇) 중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전당지에는 여덟 칸의 도리간과 세 칸의 들보간으로 된 굴립주(掘立柱) 건물이 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당지에는 거주 흔적은 없으며 그 규모로 보아 전례(典禮)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당의 주위에는 청동기를 주조하는 공방이 있으며, 토기를 굽는 가마장도 있다. 정주 이리강의 도성터는 상대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벽은 판축법에 의해 구축되었다. 성내의 동북부에는 토단이 몇 개 있고 굴립주의 주혈이 늘어서 있다. 성벽의 남북 바깥쪽에는 청동기 주조 공방터가 발굴되었다. 북벽 밖에는 골기(骨器) 가공장이 있었는데, 원료를 동물의 뼈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포로였을 사람의 뼈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예:상대 초기의 이리두 제3기 유적에서는 청동제인 작은 칼, 송곳, 화살촉, 방울 외에 작(爵)이 나오고 동(銅)을 주물하는 거푸집도 발견되고 있다. 상대 중기의 이리강 유적에서는 청동 용기는 크고 그릇의 벽은 두꺼워지고 문양은 도철문* 등이 볼록선으로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문양대 이외에는 유정문(乳釘文)이나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 후기에는 청동기의 수도 많고 〈사모무정司母戊鼎〉 같이 높이 133cm, 무게 875kg이나 되는 거대한 것도 있다. 주조방법은 동의 원료인 공작석과 석광을 채굴하여 정련한 다음, 도제 도가니에서 녹여 거푸집에 흘려 넣어 청동기를 만들었다. 식기(食器), 주기(酒器), 악기(樂器) 등의 청동기의 종류가 많아진 것은 지배자의 생활수요가 점점 확대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상대의 토기는 초기에는 회도(灰陶)가 주류를 이룬다. 회도의 표면에는 승문과 네모형, 뇌문의 전신 문양이 인문(印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으로 새겨진 문양의 토기는 중국 남부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상대의 토기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색토기이다. 백색토기는 자기로 취급될 정도로 섬세하게 만들어졌는데, 순수한 고령토*로 물레 위에서 마무리한 뒤 1,000℃정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또한 하남성과 호북성湖北省에서는 유약을 바른 그릇들도 출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