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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미술회

서화미술회 書畵美術會

1911년 윤영기尹永基 등이 ‘고금서화(古今書畵)의 모집, 진열과 서화교육’을 목표로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을 설립했을 때 그 운영위원회격으로 결성된 모임. 후원은 이완용, 조중용, 조민희 같은 친일세도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재정 후원을 받는 등 총독부 영향권 안의 서화 애호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윤영기로부터 경성서화원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후 1912년에 강습소를 설치하여 조석진趙錫晉(1853~1920), 안중식安中植(1861~1919), 정대유丁大有(1852~1927), 강진희姜璡熙(1851~1919), 김응원金應元(1855~1921), 강필주姜弼周(1860경~1923), 이도영李道榮(1884~1933)등 7명의 교사진으로 각각 3년 수업 과정의 서과(書科)와 화과(畵科)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다. 정대유와 강진희가 지도한 서과에서는 전*(篆), 예*(隸), 해*(楷), 행서*(行書)를 가르쳤고, 화과에서는 산수(山水), 인물(人物)로부터 화조*(花鳥),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모든 전통적 화법을 가르쳤는데, 주된 교육방식은 화보(畵譜)나 중국화가의 그림을 임모*(臨摹)하는 봉건적인 교육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1913년과 1915년에는 전람회를 개최하여 근대적인 미술문화의 보급에 기여했다. 1919년 해체될 때까지 화과 졸업생으로 1회(1914) 오일영吳一英(1810~1960), 이용우李用雨(1902~1952), 2회(1915) 김은호金殷鎬(1892~1979), 3회(1917) 박승무朴勝武(1893~1980), 4회(1918) 이상범李象範(1897~1972), 노수현虜壽鉉(1899~1978), 최우석崔禹錫(1899~1965) 등을 배출하여 다음 시기 서화협회*書畵協會와 같은 근대적인 미술가단체가 결성되고 활발한 미술활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화박사

서화박사 書畵博士

서화감식 및 서화가의 육성을 담당했던 중국의 관직. 당대(唐代)에 국자감國子監 소속의 전문학교로서 서학(書學)이 설립되었고 교수로서 박사가 있었다. 북송北宋 말기 휘종 재위시(1104)에는 서학과 함께 화학(畵學)이 개설되어 교수직으로 박사를 두었다. 그후 1110년에는 화학을 한림도화국翰林圖畵局에, 서학을 한림서예국翰林書藝局에 소속시켰다. 당시의 저명한 서화박사로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송자방宋子房(쏭 쯔황) 등이 있다.

서화일치론

서화일치론 書畵一致論

글씨와 그림은 기원이 같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는 설. 당대(唐代)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경)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고대(古代)에는 글씨와 회화가 동체(同體)였다고 주장하였다. 본시 글씨와 회화는 그 근본을 같이 하였는데, 순임금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 육탐미陸探微(루 탄웨이),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의 용필(用筆)을 연구하면서 “글씨와 그림의 용필법(用筆法)은 같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언원의 주장은 당대 이후에 발전한 회화예술이 육조이래로 이미 예술적 가치를 확립하고 있던 글씨에 필적한다는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장언원의 서화일치론은 그 후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이다가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에 이르러 보다 심화되었다. 조맹부는 “그림과 서예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으로 발전시켰다. 즉 장언원은 서화의 용필법이 같고 기원이 같다고 하였을 뿐이고, 서예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림은 형(形)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 서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조맹부는 형사*(形似)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서화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강조하였다. 또 형사와 대립되는 서예적인 심미기준을 회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대입하려고 하였다. 이는 북송(北宋)시대에 발전하였던 ‘서화란 작자의 인품반영’이라는 문인화*론의 또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화협회

서화협회 書畵協會

일제시기에 서예가, 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최초의 미술인 단체. 1918년 서울에서 발족하여 모두 15회의 협회전을 가졌으며 1937년 총독부의 정지령에 의해 조직활동이 중단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던 1911년 윤영기尹永基의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과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晉(1853~1920)이 주도하는 서화미술회* 등 제자들을 양성하는 강습소가 생겼다. 1915년 김규진金圭鎭(1868~1933)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생기고 평양이나 대구에도 학원이 생겨나서 미술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느나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전시무대나 구심적인 단체가 없는 상태였다. 이무렵 일본인 양화가들이 한국에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만들어 화단을 끌어갈 기세를 보이자 주체성이 있는 단체의 결속을 절감한 미술가들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을 중심으로 하여 조석진, 안중식, 오세창吳世昌(1864~1953), 김규진, 정대유丁大有(1852~1927), 현채玄采(1856~1925), 강진희姜璡熙(1851~1919), 김응원金應元(1855~1921), 정학수丁學秀, 강필주姜弼周(1860경~1923), 김돈희金敦熙(1871~1936), 이도영李道榮(1884~1933) 등 13명을 발기인으로 서화협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으로는 안중식이 선출되었다. 협회의 명칭에 ‘미술’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은 것은 일본이 만든 신조어라는 거부감과 전통적인 용어를 고수하려는 원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예부총재에 김윤식金允植, 고문에 이완용, 민병석, 김가진, 박기양 등 한일합방 주역이었던 친일 고관를 내세우고 있어서, 협회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서화협회는 창립 직후 3•1운동의 격동 속에서 안중식, 강진희, 조석진의 타계와 일부 회원의 탈퇴로 2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21년 4월초에 창립전을 열어 안중식, 조석진의 유작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정선鄭敾(1676~1759),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명품을 전시하고 김은호金殷鎬(1892~1979), 이상범李象範(1897~1972), 노수현盧壽鉉(1899~1978), 최우석崔禹錫(1899~1965) 등 신진의 동양화와 고희동, 나혜석羅蕙錫(1896~1948)의 유화작품을 선보였다. 이어서 1922년 3월에는 제2회 전시회를 개최하고 《서화협회보書畵 協會報》를 발간하며 서화학원도 개설하는 등 초반에는 저변확대와 신진양성을 위한 왕성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22년 6월, 문화정책을 표방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창립과 더불어, 기구의 규모나 운영의 측면에서 관전(官展)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서화협회전은 지속적인 주목과 확산에 성공하지 못하고 기존의 회원들마저 이탈하면서 선전(鮮展)과의 경쟁에서 점차 도태되게 되었다. 일부회원의 선전 출품거부와 동아일보 등 여론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 내부의 의식차이와 불화는 전시회의 부실화를 자초하여 1929년 심영섭沈英燮은 서화협회가 처음부터 뚜렷한 민족지향이나 성격이 없었다는 점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 속에서 서화협회는 1930년 임원진을 새로 구성하고 1931년부터 신인공모제를 채택하는 등의 개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이후 김기창金基昶(1914~ ), 한유동韓維東(1913~ ), 장우성張遇聖(1912~ ), 이여성李如星(1901~?), 이응노李應魯(1904~1989), 이경배李慶培(1900~1961), 정용희鄭用姬(1914~?) 등의 신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협회전은 동양화 작가들을 주축으로 50여명을 넘지 못한 회원, 비회원의 출품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