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리
에스프리 esprit(프)
‘영(靈)’ ‘넋’ ‘정신’의 뜻이며, ‘기질’ ‘재치’ ‘기지’ ‘능력’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라틴어의 호흡이란 말에서 파생되었다. 미술작품을 논할 때 에스프리는 작가적 정신이나 번뜩이는 재치, 개성 등을 의미한다.
에스프리 esprit(프)
‘영(靈)’ ‘넋’ ‘정신’의 뜻이며, ‘기질’ ‘재치’ ‘기지’ ‘능력’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라틴어의 호흡이란 말에서 파생되었다. 미술작품을 논할 때 에스프리는 작가적 정신이나 번뜩이는 재치, 개성 등을 의미한다.
에스프리 누보 Esprit Nouveau(프)
제1차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혁명운동의 하나로, 문학 미술 건축 음악 등 넓은 범위에 걸쳐 그 표현과 형식을 근대정신에 합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를 의미한다. 에스프리 누보는 ‘새로운 정신’이란 뜻으로,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장식예술박람회에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세운 전시관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여기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를 도입, 과도한 장식의 이른바 ‘근대 양식’의 불필요한 부분을 일체 배제한 기능주의적 건물로 설계함으로써 건축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에스프리 누보는 화려한 양식*과 기능이 없는 장식*에 대한 반발로 회화의 순수주의* 운동과 호응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건축과 공예* 분야에서 19세기적인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에스프리 누보》는 르 코르뷔지에, 데르메Paul Dermée, 오장팡Amédéo Ozenfant 등이 참여, 1920년 1월에 창간되고 1925년 28호로 폐간된 동명의 잡지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순수주의 및 기계 미학, 합리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미학의 입장에 있었으며, 미술, 문학, 과학,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분야와 관계하였다.
에어 아트 Air Art(영)
원래 환경예술*과 키네틱 아트*의 한 종류로 압축 공기나 자연적인 바람을 이용해 부풀리거나 띄워 올리는 여러 가지 구조물 및 거기에 뒤따르는 광범위한 행위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전통적인 타블로*와 조각의 상투적인 미학을 벗어나 공기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유의 자연적인 성질을 이용하여(특히 보이지 않는 기체를 보이게 한다는 것과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부유의 관념이 생긴다는 점, 그리고 기체의 팽창되어 가는 이미지가 전달하는 소유의 관념과 소유로부터의 해방, 소유하는 일의 불가능성 등의 관념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예술 작업으로 전개된 이 움직임은 1960년대 말의 세 가지 커다란 기획전을 통해 그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즉 1968년 파리에서 개최된 <확대구조물전>, 같은 해 필라델피아 아트 카운슬에서 열린 <에어 아트전>(하케Hans Haacke, 레빈Levine, 메달라,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등이 참가), 또 뉴욕 유태미술관에서 열린 <팽창조각전>(1969)에는 프레지어, 자콥스, 윌리엄스Emmett Williams, 워홀Andy Warhol, 피네Otto Piene 등이 참가했다. 여기에 참여한 작가들 중 대부분은 에어 아트의 의식과 방법론에 대해 비전문가적 입장이었지만, 오토 피네만은 스카이 아트*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마침내 뮌헨 올림픽에 올림픽 무지개를 띄워 올릴 만큼 전문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에어 아트의 중요한 의의라면 첫째 작업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대중성, 둘째 참여적인 요소, 셋째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난 반(反)오브제, 후기 오브제 미술에 대한 공헌 등을 들 수 있다.
에칭 etching(영)
산(酸)의 부식작용을 이용하는 판화*의 한 방법. 잘 닦여진 동판에 산의 화학작용을 방지하는 내산성 방식제, 즉 보통 밀랍, 역청(瀝靑), 송진 등이 혼합된 ‘에칭 그라운드’를 입힌다. 검은 피복을 입힌 이 판에 금속 바늘로 형태를 새겨 그 선을 따라 아래의 금속이 노출되도록 하고 판의 뒷면과 모서리는 내산성으로 처리된 바니시*를 덮은 후, 희석된 산에 담근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질산을 사용하며, 부식액 속에 담겨진 판은 바늘로 긁어 그라운드가 벗겨진 부분만 부식이 됨으로써 판에 그 형태가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에칭의 효과는 같은 동판화의 일종인 선 인그레이빙*과 비교되곤 한다. 선 인그레이빙이 기구를 사용하여 판에 직접 힘을 주어 새김으로써 손의 압력에 따라 선의 굵기가 결정되며 계획성과 금속성의 명쾌함을 드러내는 특성을 갖는다면, 에칭의 특징은 부드러운 그라운드 위에 형태를 그림으로써 펜이나 연필로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것과 같이 선들이 자연스럽다는 것과, 또 부식의 정도에 따라 선의 굵기와 깊이가 결정된다는 점에 있다.
에칭이 작품으로 선보인 시기는 151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금공기법으로 존재하여 갑옷이나 투구를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는 철판을 이용하여 에칭을 하였는데 상당히 강렬하고 거친 부식효과를 내고 있다. 뒤러 외에도 당시 북구의 그라프Urs Graf,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1480~1538), 반 레이든Lucas van Leyden(c.1492~1533) 및 이탈리아의 파르미지아니노Parmigianino 등이 에칭 기법을 사용하였고, 17세기 초에는 랄로Jacques Lallot와 보스Abraham Boss가 큰 활약상을 보였다. 이들 에칭의 구파(舊派)들은 에칭 기법만의 특이성을 살렸다기보다는 선 인그레이빙의 대체 기법으로 간주한 측면이 강하였다.
최초의 근대적인 에칭 화가는 작품에 풍부한 감정과 힘을 실었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였으나 에칭 미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8세기에는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1969~1770)가 환상적인 주제를 다룬 작은 크기의 에칭에서 자신의 대형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빛, 대기, 공간에 대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18세기말 스페인에서는 고야Francisco de Goya(1746~1828)가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부식된 선뿐 아니라 그늘진 작은 부분까지도 나타낸, 정교하고 세밀한 에칭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작품들이 많았다.
19세기 말에는 밀레Jean François Millet(1814~1875),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드가Edgar Degas(1834~1917)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뛰어난 작가들 대부분이 에칭을 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많은 화가들이 책의 삽화나 감식가를 위해 고안된 소수의 제한된 판을 제작하거나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위한 에칭을 만들어내고 있다.
에코르셰 écorché(프)
인체나 동물 근육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 피부 밑이나 근육의 노출된 상태를 그린 드로잉이나 판화*, 조각 * 등을 일컫는 말. 16세기부터 미술가들의 작업실에 구비되어, 미술 해부학 교육에 사용되었다. 잘 알려진 에코르셰 습작으로는 다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가 자신의 노트에 스케치한 인물과 동물의 형상들이 있고, 스텁George Stubb의 <말의 해부학The Anatomy of the Horse>(1766)이 있다.
에콜 데 보자르 École (Nationale Supérieur) des Beaux-Arts(프)
화가, 조각가, 건축가를 위한 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프랑스 유일의 공적인 미술교육기관. 파리의 보나파르트가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성(文化省)에서 관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여러 교육체제의 근대화에 따라 예부터 전래되어 오던 도제학교를 대신하여 등장한 것이며, 건축, 조각, 회화, 판화 등 4가지 분야로 나뉘어진다.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의 각종 왕립 아카데미에서 행해진 교육이 콜레지 드 카르트 나숑에 통일된 것이 시초이며, 1820년에 오늘날의 건물 건축이 드브레에 위촉되었다.
이 학교는 17~30세까지의 지망자가 시험을 거쳐 입학하게 된다. 아틀리에*에서의 제작이 교육의 중심이며, 그 밖에 일반 교양, 전문강좌가 있다. 아틀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장관이 임명한 교수의 아틀리에로 학교 내에 있고, 다른 하나는 학교 외에 설치되어 있는 자유 교실로, 교수는 학생에 의해 선임된다. 매년 각종 콩쿠르가 행해져 상이 주어진다. 19세기에는 예술가들에게 로마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던 로마 대상으로 특히 유명했다. 이 학교는 그 보수성 때문에 이따금 진보적인 재야 미술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에콜 드 파리 École de Paris(프)
파리 파(派). 파리에 모였던 외국인 예술가의 집단을 말한다. 19세기 말 또는 제1차세계대전 후 파리를 비롯, 여러 지역에서 각 시대마다 이와 같은 성격의 집단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제1차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킨다.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나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파에 속하나 편의상 다른 유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앙데팡당*의 화가들, 특히 서정적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Amadeo Modigliani(1884~1920), 리투아니아의 수틴Chaim Soutine(1894~1943), 폴란드의 키슬링Moïse Kisling(1891~1953), 네덜란드의 반 동겐Kees van Dongen(1877~1968), 일본의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등이 주요 작가이며, 샤갈Marc Chagall(1887~1985)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조국을 떠난 외국인이었는데, 이 파의 근저에 짙게 깔려 있는 애수와 표현주의적 경향은 이러한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은 파리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민족적 자질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특징을 보였다. 이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미려하고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나 대체로 이론의 구성에는 약했던 면도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이상의 제1, 2차세계대전 사이의 에콜 드 파리를 파리파로, 제2차세계대전 중에 일어났던 ‘프랑스 전통 청년화가’의 작가들을 제2차 에콜 드 파리로 부른다. 후자의 작품 경향은 제1차 파리파와는 반대로 프랑스의 전통을 중시했으며 종합적이고 진보적인 화풍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제2차대전 후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파리에서 활약하는 내외미술가들의 총칭으로도 사용되었고, 이는 특정한 유파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미술의 중심지로서 파리의 위광을 뜻하는 단어로 이해된다.
에키누스 echinus(영)
도리아식 원주에 있어서 주두의 둥글게 말아 올린 형태로, 아바쿠스*와 기둥 몸체 사이에 있는 넓은 사발형의 부분. 에키누스란 그리스어로 ‘성게’라는 뜻인데, 이는 옛날 도리아식 주두가 성게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난족(卵族) 무늬로 채색을 하기도 했다.
→ ‘주식’ 참조
에키포 57 Equipo 57(스)
스페인의 젊은 작가들의 그룹. 특히 1957년 에스파시오 그룹(1954년에 결성됨)에서 탈퇴한 코르도바 출신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두아르테José Duarte, 세라노Juan Serano, 두아르트Ángel Duart, 이바롤라Augustin Ibbarola, 쿠엔카 Juan Cuenca등이 주요 멤버이며, 구축주의* 양식을 이론적 근거로 하고 있다. 미술 작품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작가 개인의 역할에 비중을 두지 않기 위해서 집단창작을 선호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전시회를 연 바 있다. 이들의 활동은 1966년으로 마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