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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龍 nāga(범)

팔부중* 가운데 하나. 인도 신화에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 용에 대한 신앙은 아리아족의 침입 이전 고대 인도의 나가족 사이에서 이미 시작되었는데, 나가족이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나가가 불교의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용은 인도 원주민의 사신(蛇神)숭배사상과 중국의 용신앙이 결합되어 전래된 것이다. 중국에서 용은 상상의 동물이자 상서로운 동물(靈獸)로서, 비를 내려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황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선승들에게 용은 선정(禪定)에 이른 자에게 나타나는 진리의 순간을 상징한다. 송대(宋代)의 목계牧谿(무 시)가 그린 용이 유명하며, 보스턴박물관 소장 진용陳容(츠언 르옹)의 〈구룡도九龍圖〉(1244)는 진필(眞筆)로서 송대의 역작이다.
한국에서 용에 관한 신앙은 신라시대부터 호법, 호국용(護法, 護國龍)으로서 신앙되었으며, 천령(天靈), 오악명산(五岳名山)과 함께 대천용신을 섬기는 팔관회(八關會)와 용왕도장(龍王道場)들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에 용을 그려 행했다는 기록을 볼 때 용신신앙이 뿌리깊었음을 알 수 있다. 신중*탱화에 표현되는 용왕의 형상은 제왕의 복식에 얼굴은 용눈썹, 용수염으로 덮여 있고, 불꽃이 올라오는 구슬이 있는 관을 쓰고 손에는 용뿔을 들고 있다.

용문석굴

용문석굴 龍門石窟
Long-wên(중)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남쪽으로 14km 정도 이수伊水를 따라 내려가면 동서 양안의 석회암 산허리에 위치한 불교석굴이 나온다. 그 암벽이 마치 우뚝 솟은 궐문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궐(伊闕)’ 또는 ‘용문(龍門)’이라 불렸다. 커다란 굴은 서산(西山)에 28개, 동산(東山)에 7개, 그 외에도 2,000여 개 정도의 작은 굴과 감실이 있다. 북위北魏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태화 18년(太和, 494)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 북송北宋 등 각 시대마다 계속하여 조성되었다. 서산(西山)에는 가장 오래된 고양동(古陽洞)을 비롯하여 선무제가 발원한 빈양동(賓陽洞)과 연화동(蓮華洞), 위자동(魏字洞, 제17동) 등 북위 말기의 석굴이 많다.
운강석굴*에 비해 탑굴이 없는 불상중심의 석굴뿐이지만, 불상은 중국식 복식을 한 상현좌*(裳懸座)가 발달했다. 빈양중동이 용문 북위굴 중에서는 최대이다. 빈양, 남북동과 약방동(藥方洞)의 건설은 북위 때 시작되어 북제, 수까지 계속되었다. 초당 전기에는 위왕태魏王泰(웨이 우앙타이)가 빈양 3동을 다시 보수했고, 재발동(齊秡洞)을 만든 후 그곳에 저수량褚遂良(주 쑤에리앙)이 쓴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를 세웠다.
초당 후기는 용문석굴의 최성기로, 경선사동(敬善寺洞), 쌍동(雙洞, 제7, 8동), 만불동(萬佛洞), 사자동(獅子洞), 혜간동(惠簡洞), 노용동(老龍洞, 제12동), 봉선사동(奉先寺洞)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당의 고종高宗이 발원한 봉선사동의 비로자나불*은 이 시기 최대의 것으로, 함형 3년(672)부터 상원 2년(675)까지 만들어졌다. 수, 당의 굴은 서산 북쪽 끝에서 시작되었는데, 측천무후 시대(690~705) 말기에 정토동(淨土洞), 극남동(極南洞) 등이 남쪽 끝까지 이르러 서산에는 더 이상 석굴을 뚫을 곳이 없게 되었으므로, 동산(東山)에 간경사동(看經寺洞), 뇌고대동(擂鼓臺洞) 3동 등 여러 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 당의 석굴은 대부분 성당(盛唐)까지 만들어졌는데, 그 후로는 쇠퇴하였다. 그리고 북위의 석굴에는 불상 외에 불상 조성에 관한 글을 돌에 새긴 것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은 〈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 〈용문오십품龍門五十品〉으로 불린다.

용산문화

용산문화 龍山文化

→ ‘중국 신석기시대 미술’ 참조

용천요

용천요 龍泉窯
long-quan-yao(중)

절강성浙江省 여수麗水 지구 및 서강西江 연변에 위치한 도요*지. 그 중에 용천현龍泉縣의 경내에 가장 밀집했는데 용천현의 대요촌大窯村에서 제작된 도자기의 질이 가장 좋았다. 북송대(北宋代)에 성립되어 남송南宋, 원元, 금대(金代)에 이르기까지 흥성했고 명明 중기 이후에 점차 쇠퇴하여 청淸나라 중엽에 폐요됐다. 생산품은 청자*가 유명하다. 북송대에 유약이 현저하게 세련되어졌고 남송 후기 전성기에는 옥같은 유색(釉色)과 고아한 조형의 청자를 만들었다. 일본인이 ‘침청자砧靑磁’라고 부르는 용천요의 방망이 모양의 청자는 벽옥(碧玉)보다 아름답고 밝은 유색으로 독특하게 아름다운 청록색을 보여준다. 원대(元代)에 들어서는 일변하여 장식이 많아지고 다양해졌고, 명대(明代) 성화(成化), 홍치 연간(紅治) 이후에 점차 쇠락했다. 용천요의 청자는 13~14세기경에 생산량이 상당히 많아져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서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빈번하게 수출되었다.

용호도

용호도 龍虎圖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용*과 호랑이를 그린 것이다. 용이나 호랑이는 상 주(商周)시대의 청동기 문양 속에 나타나 있을 정도로 오래된 회화소재이다. 예부터 용은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비유되어 왕(王)이나 물을 다스리는 용왕(龍王)을 뜻하기도 하는 등 숭배의 대상이었다. 호랑이 역시 삼재(三災)를 쫓아 주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물에는 용왕이 있고 산에는 호랑이가 있어 자신들을 액운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용호도는 이러한 믿음이나 역술 시문(詩文) 등에서 벽사나 위력의 상징으로 다루어지던 용과 호랑이를 회화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용호도는 고대부터 단독으로 또는 사신*도(四神圖)의 하나로 그려졌다.
당대(唐代) 이후 감상화 위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용그림의 진용陳容(츠언 르옹), 호랑이 그림의 포가包家(파오 치아)와 같은 전문화가도 나타났다. 용과 호랑이를 함께 대치시켜 그린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남송南宋 목계牧谿(무 시)의 그림이 유명하고 두 폭의 나한도에 용과 호랑이를 나누어 그린 것도 있다. 한국의 용호도도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청동기의 문양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