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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롱

파트롱 patron(프)

보호자라는 의미. 미술에서는 예술의 보호자, 후원자를 가리킨다. 17세기 이전에는 미술작품이 단지 쓸모있다거나 소유자의 명예를 돋보이게 하는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유명한 미술가를 후원하고 기릴 만하다고 믿었던 최초의 증거는 1334년 피렌체 시정부가 지오토Giotto(1266~1337)를 고용한 법령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지오토란 존재가 그 도시의 명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1401년 피렌체의 세례당을 위해 치러진 시험 역시 이를 반증한다.
15세기 피렌체의 상인 루첼라이Rucellai는 자신에게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 같은 화가를 고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신에게 감사했다. 미술가들이 문필가들이 받는 대접과 대등한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메디치 가*에 거액을 요구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0~1506)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15세기와 16세기초에 로마 교황청이 벌인 미술 진흥사업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증거는 많다. 역대 교황 중 가장 두드러진 후원자였던 율리우스 2세는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를 부흥시키려 했고,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도움을 얻어 제국적 위엄을 회복하려고 계획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권력자들이 만든 이러한 유형은 알프스 산맥 너머의 북쪽 나라에까지 이어졌다. 프란시스Francis 1세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0)를, 막시밀리안Maximillian왕은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를, 헨리Henry 8세는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과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고용했다.
이때부터 통치자들은 그들의 통치기간 중 미술이 번성했다고 얘기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국가 권력의 후원과 성격이 다른 상업적 가치를 위한 후원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1683)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프랑스의 디자인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때부터 공적 후원의 이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19세기 이전 영국은 이러한 경향을 등한시해 호가드William Hogarth(1697~1764)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영국 미술가들이 당한 불이익을 한탄한 최초의 미술가였다. 프랑스의 제도를 모방, 왕실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를 설립한 목적 속에는 후원자의 안목으로 영국 미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19세기에 대중과 미술가의 소외현상이 심화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가 소외되고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이 자살한 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평범한 사람의 기호에 영합하기를 거부한다는 표시였다.
그 당시 화가들은 우정으로 그의 작품을 매입할 중류계급의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법률가나 의사 등의 몇 명되지 않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후원이 이런 종류였다.
후원자로서 안목을 갖춘 화상이 등장한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뒤레Théodore Duret와 볼라르Ambroise Vollard 같은 화상은 젊은 미술가나 새로운 미술운동에 명성과 돈을 걸었고, 심지어 화가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