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장
감장 嵌裝
금판 위에 청옥(靑玉) 등을 박은 알집을 또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기법으로, ‘알물림’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금 장신구의 장식기법으로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입사*(入絲) 기법으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감장 嵌裝
금판 위에 청옥(靑玉) 등을 박은 알집을 또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기법으로, ‘알물림’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금 장신구의 장식기법으로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입사*(入絲) 기법으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감정 鑑定 connoisseurship(영)
예술작품이나 골동품 등의 진위여부, 작자, 제작 연대, 재질, 제재 등을 전문가의 입장에서 사정, 평가하는 행위. 정확한 감정에는 역사적ㆍ문헌학적으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감상*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뛰어난 직관력, 소위 감식안과 과학적 기술(재료 및 기법의 분석, X선, 적외선 투사)을 요하는 까닭에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다. 감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감정가(鑑定家)라고 하며, 그 진위에 대한 판단을 보증하는 서류를 감정서(鑑定書)라고 한다.
감정이입 미학 感情移入美學
Einfühlungsästhetik(독)
19세기 중엽, 피셔Friedrich Theodor Vischer가 자연미의 미적 관조*를 일상적 지각이나 과학적 관찰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 이어서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립스Theodor Lipps가 미*를 관조할 때 대상과 자아감정이 융합, 동일된 상태를 감정이입이라 규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미의식*을 설명하여 감정이입의 미학을 주창하였다.
감정이입은 인간에 대해 일어나는 ‘본래적 감정이입’과 인간 이외의 자연물에 대한 ‘상징적 감정이입’으로 나뉘어진다. 또한 미술사가 보링거Wilhelm Worringer는 감정이입 개념을 예술창작의 근본적 충동에 적용하여 예술의욕(Kunstwollen)을 규정하는 두 가지 근원으로서 ‘감정이입 충동’과 ‘추상 충동’을 대치시켰다.
감지 紺紙
감람색(紺藍色)으로 착색한 종이를 말하며 중국에서는 이 감색을 자감색(磁紺色)이라고도 한다. 경전을 필사할 때는 금니(金泥), 은니(銀泥), 주(朱) 등으로 하였으며 ‘감지금니(紺紙金泥)’라 부른다. 경전에 먹 대신에 금은의 니(泥)로써 감지 위에 필사하는 이유는 엄숙함과 장중함을 느끼게 하려는 목적이다. 금니사경은 경전의 경건성을 높이기 위해 귀족사회에서 종교적 행사로 행해졌다.
감필묘 減筆描
붓질을 많이 하지 않고 최소한의 필선으로 자유분방하고 빠른 속도로 그리는 기법. 원래는 생필(省筆), 약필(略筆)이라 하여 글자의 자획을 줄여서 쓰는 서예의 기법이었으나, 당말오대(唐末五代) 때부터 회화기법으로 응용되기 시작하여 남송南宋의 양해梁楷(량 카이)에 의해 그 전통이 확립되었다.
대상의 본질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므로 간략화된 형태로 나타나며 일품화가(逸品畵家)나 선승화가(禪僧畵家)들이 사의적(寫意的)인 인물화를 그릴 때 애용하였다.
갑골문 甲骨文
거북 껍질과 짐승의 뼈에 새겨진 중국 은殷, 상商 시기의 문자. 계문(契文), 복사(卜辭), 귀갑문자(龜甲文字),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함. 은상때(기원전 16~11세기)에는 갑골을 사용하여 점을 친 후 그 위에 점복과 관련된 사항을 기재하였다. 대체로 윗부분에 점괘를 쓰고 아랫부분에는 점괘의 내용을 썼다. 1899년 중국의 왕의영王懿榮(우앙 이잉), 유악劉鶚(리우 어) 등에 의해 하남河南 안양安陽 소둔촌小屯村 은허유적에서 최초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십여만편, 4,600자 내외에 이르며, 1904년 손치양孫治讓(순 즈량)이 《계문거례契文擧例》에서 해석을 시도한 이래 지금까지 약 1,700여자가 해석되었다. 은대(殷代) 갑골문의 서풍(書風)은 동작빈董作賓(뚱 줘빈)에 의해서 5단계로 구분된 바 있다. 대체로 고자(古字)로 아직 완전한 필획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순수한 그림글씨보다는 상당히 진보된 단계다.
갑발 匣鉢
그릇을 가마에 쌓을 때 그릇 위에 씌워서 그릇에 재가 앉는 것을 방지하고, 불길이 직접 그릇에 닿지 않게 하는 내화토(耐火土)로 만든 합(盒). 갑발에 넣어 정교하게 제작하는 방식을 ‘갑번(匣燔)’, 그렇게 만든 그릇을 ‘갑기(匣器)’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당唐나라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10세기 무렵 고려청자* 서남해안 요지(窯址)에서부터 갑발편이 발견되었다. 이 방식으로 구우면 그릇과 그릇을 포개서 굽는 것보다 질과 색이 우수하지만 많은 비용이 들어서 주로 상품(上品)과 중품(中品)의 도자기 제작에 사용되었다. 그릇 내저에 모래받침 자국이 남지 않아 보다 완성도가 높은 그릇을 제작할 수 있다.
강가 Gangā(범)
인도의 갠지스 강을 의인화한 여신. 강가의 상징이자 바하나*인 마카라Makarā는 물에 사는 악어와 유사하게 생긴 괴수로 물을 상징한다. 인도의 야무나Yamuna강을 신격화한 야무나 여신과 같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야무나 여신의 바하나(乘物)는 거북. 힌두교의 신화를 보면 원래 천상에서 흐르고 있던 강가 여신은 시바*의 머리카락을 통해 지상으로 하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도 타밀 나두Tamil Nādu주의 마말라푸람Māmallapuram에는 7~8세기경인 팔라바 왕조시대*에 제작된 거대한 암각 부조*가 남아 있는데, 바로 강가 여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신화를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강남산수 江南山水
강남(江南)지방의 특유한 지형을 표현한 그림. 양자강 이남의 물과 평지가 많은 특유의 경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황량하고 거대한 풍경을 그린 이곽파*李郭派의 화북산수(華北山水)와 대비된다. 강남산수의 전통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로부터라고 생각되지만, 오대(五代)의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이 그 양식을 정립하였다. 평담고아(平淡古雅)한 방식으로 그려진 둥근 언덕과 부드러운 형태의 지형이 표현된다. 강남지방의 지형과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긴 피마준* 또는 먹선에 흰 부분이 많이 보이는 비백서*나 초서*의 법을 활용한 묘사법을 사용했으며 호초점*을 풍부히 사용하여 부드러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온화한 분위기의 강남산수는 원사대가*(元四大家)와 명대(明代)의 오파*吳派 등에게로 이어져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