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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박사

서화박사 書畵博士

서화감식 및 서화가의 육성을 담당했던 중국의 관직. 당대(唐代)에 국자감國子監 소속의 전문학교로서 서학(書學)이 설립되었고 교수로서 박사가 있었다. 북송北宋 말기 휘종 재위시(1104)에는 서학과 함께 화학(畵學)이 개설되어 교수직으로 박사를 두었다. 그후 1110년에는 화학을 한림도화국翰林圖畵局에, 서학을 한림서예국翰林書藝局에 소속시켰다. 당시의 저명한 서화박사로 미불米芾(미 후, 1051~1107), 송자방宋子房(쏭 쯔황) 등이 있다.

서화일치론

서화일치론 書畵一致論

글씨와 그림은 기원이 같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는 설. 당대(唐代)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경)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고대(古代)에는 글씨와 회화가 동체(同體)였다고 주장하였다. 본시 글씨와 회화는 그 근본을 같이 하였는데, 순임금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 육탐미陸探微(루 탄웨이),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의 용필(用筆)을 연구하면서 “글씨와 그림의 용필법(用筆法)은 같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언원의 주장은 당대 이후에 발전한 회화예술이 육조이래로 이미 예술적 가치를 확립하고 있던 글씨에 필적한다는 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장언원의 서화일치론은 그 후 다양한 발전양상을 보이다가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에 이르러 보다 심화되었다. 조맹부는 “그림과 서예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으로 발전시켰다. 즉 장언원은 서화의 용필법이 같고 기원이 같다고 하였을 뿐이고, 서예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림은 형(形)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 서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조맹부는 형사*(形似)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서화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강조하였다. 또 형사와 대립되는 서예적인 심미기준을 회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대입하려고 하였다. 이는 북송(北宋)시대에 발전하였던 ‘서화란 작자의 인품반영’이라는 문인화*론의 또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화협회

서화협회 書畵協會

일제시기에 서예가, 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최초의 미술인 단체. 1918년 서울에서 발족하여 모두 15회의 협회전을 가졌으며 1937년 총독부의 정지령에 의해 조직활동이 중단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던 1911년 윤영기尹永基의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과 안중식安中植(1861~1919), 조석진趙錫晉(1853~1920)이 주도하는 서화미술회* 등 제자들을 양성하는 강습소가 생겼다. 1915년 김규진金圭鎭(1868~1933)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생기고 평양이나 대구에도 학원이 생겨나서 미술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느나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전시무대나 구심적인 단체가 없는 상태였다. 이무렵 일본인 양화가들이 한국에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만들어 화단을 끌어갈 기세를 보이자 주체성이 있는 단체의 결속을 절감한 미술가들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을 중심으로 하여 조석진, 안중식, 오세창吳世昌(1864~1953), 김규진, 정대유丁大有(1852~1927), 현채玄采(1856~1925), 강진희姜璡熙(1851~1919), 김응원金應元(1855~1921), 정학수丁學秀, 강필주姜弼周(1860경~1923), 김돈희金敦熙(1871~1936), 이도영李道榮(1884~1933) 등 13명을 발기인으로 서화협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으로는 안중식이 선출되었다. 협회의 명칭에 ‘미술’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은 것은 일본이 만든 신조어라는 거부감과 전통적인 용어를 고수하려는 원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예부총재에 김윤식金允植, 고문에 이완용, 민병석, 김가진, 박기양 등 한일합방 주역이었던 친일 고관를 내세우고 있어서, 협회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서화협회는 창립 직후 3•1운동의 격동 속에서 안중식, 강진희, 조석진의 타계와 일부 회원의 탈퇴로 2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21년 4월초에 창립전을 열어 안중식, 조석진의 유작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정선鄭敾(1676~1759),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명품을 전시하고 김은호金殷鎬(1892~1979), 이상범李象範(1897~1972), 노수현盧壽鉉(1899~1978), 최우석崔禹錫(1899~1965) 등 신진의 동양화와 고희동, 나혜석羅蕙錫(1896~1948)의 유화작품을 선보였다. 이어서 1922년 3월에는 제2회 전시회를 개최하고 《서화협회보書畵 協會報》를 발간하며 서화학원도 개설하는 등 초반에는 저변확대와 신진양성을 위한 왕성한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1922년 6월, 문화정책을 표방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의 창립과 더불어, 기구의 규모나 운영의 측면에서 관전(官展)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서화협회전은 지속적인 주목과 확산에 성공하지 못하고 기존의 회원들마저 이탈하면서 선전(鮮展)과의 경쟁에서 점차 도태되게 되었다. 일부회원의 선전 출품거부와 동아일보 등 여론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 내부의 의식차이와 불화는 전시회의 부실화를 자초하여 1929년 심영섭沈英燮은 서화협회가 처음부터 뚜렷한 민족지향이나 성격이 없었다는 점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제기 속에서 서화협회는 1930년 임원진을 새로 구성하고 1931년부터 신인공모제를 채택하는 등의 개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이후 김기창金基昶(1914~ ), 한유동韓維東(1913~ ), 장우성張遇聖(1912~ ), 이여성李如星(1901~?), 이응노李應魯(1904~1989), 이경배李慶培(1900~1961), 정용희鄭用姬(1914~?) 등의 신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협회전은 동양화 작가들을 주축으로 50여명을 넘지 못한 회원, 비회원의 출품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석가불

석가불 釋迦佛 Śākyamuni(범)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로, 석가는 석가족(釋迦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인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약칭이며 본래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 성은 고타마Gotama喬答摩, 瞿曇이다. 석가족 출신으로 고대 인도 북부의 카필라국迦毗羅衛國 정반왕淨飯王의 장자로 태어났다.
29세에 인간 세상의 삶, 늙음, 병, 죽음이란 고뇌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하여 고된 수행을 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때가 35세(일설에는 30세라 함)로 이 사람이 바로 불교의 창시자다. 후에는 줄곧 인도 북중부의 갠지즈강 유역에서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제자도 500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80세에 세상을 떠났고, 제자들로부터 ‘현세불(現世佛)’로 추앙받았다.
《대승의장大乘義章》19권에는, “중생들이 느끼기에 뜻이 서로 통하는 듯했고, 여래께서 교화를 보이시니 사물도 함께 호응하였으므로, 응이라 이름하였다(衆生機感 義如呼喚 如來示化 事同嚮應)”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응신불(應身佛)’이라고도 부른다. 응신불은 세상의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서로 다른 상태로 현신한 것임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얼굴은 달처럼 맑고 풍만하게(面淨萬如月)’ ‘귓바퀴는 축 늘어지게(耳穿環豊)’만들며, 단정하고 자상한 모습에, 육계(肉髻), 파상계(波狀髻), 나계(螺髻)를 하고,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상(白毫像)이 있으며, 가부좌(跏趺坐), 수좌(垂坐) 및 교각좌(交脚坐)를 한 형상으로, 도덕성의 완미(完美)를 표시한다. 또한 서로 다른 정태(情態)에 따라 각종 다른 손 모양을 구별하며, 복식엔 인도의 우견편단식(右肩偏袒式) 가사 및 통견대의식(通肩大衣式) 가사, 중국 고대 한족(漢族)의 면복(冕服)을 모방한 포의박대(褒衣博帶)식이 있다.
석가상은 인체의 형상을 빌려 불상*을 처음으로 표현할 때부터 나왔으며, 탄생불을 비롯해서 출가하여 고행하는 고행상(苦行像), 구도 중에 모든 장애를 물리치는 항마상(降魔像), 정각을 이룬 성도상(成道像), 대중을 교화하는 설법상(說法像), 열반에 든 열반상(涅槃像) 등이 있다.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는 석가가 지닌 여러 가지 성격을 실체화하여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등 보다 많은 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운강석굴* 제119굴 정중앙에 천불가사(千佛袈裟)를 입은 입상, 제20굴에 웅대하고 기백에 찬 석가좌상 및 용문석굴* 빈양중동의 석가상 등은 모두 걸작이다.

석각

석각 石刻 shin-ko(중)

돌에 새긴 문자 회화를 말한다. 각석(刻石), 비갈(碑碣), 묘지(墓地), 탑명(塔銘), 부도*(浮屠), 경당(經幢), 조상기(造像記), 석궐(石闕), 마애(磨崖), 매지별(買地莂) 등을 총칭해서 석각이라고 한다. 진대(秦代)무렵부터 점차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부터 청동기 등에 새겨진 금문*(金文)과 나란히 ‘금석(金石)’이라고 칭한다. 암석은 금속처럼 수명이 길며, 금속에서는 큰 글자를 만들기 어려운데 비해, 석재에서는 큼직한 것을 새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석각의 문자와 그림은 후세에 전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작품으로 생각되고 존중되었다.

석고문

석고문 石鼓文

당초(唐初)에 중국 기주岐州 옹현雍縣에서 발견된 10개의 북모양의 돌에 새겨진 현존 최고의 한자 각석문(刻石文). 주문*(籒文)으로 쓰여진 사언시(四言詩)는 매 10수가 1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상당 문자가 결손된 상태였다.
각석의 제작자 및 시기에 대해서는 당唐 장회관張懷瓘(즈앙 후에이꾸완, 8세기 전반기 활동) 등의 ‘주선왕대수설(周宣王大狩說)’, 송宋 동유董逌(똥 여우), 정대창程大昌(츠엉 따츠앙) 등의 ‘주성왕설(周成王說)’, 정초鄭樵(즈엉 치아오)의 ‘진각설(秦刻說)’, 금金 마정국馬定國(마 띵구어)의 ‘북주설(北周說)’ 등이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은 선진(先秦)시기로 추정한다. 원석은 현재 북경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석관

석관 石棺
sarcophagus(라, 영)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는 고대 그리스*, 라틴인들이 조각한 돌이나 테라코타*로 된 관에 붙인 명칭. 플리니Pliny(c.23~79)에 따르면, ‘살을 먹어 치운다 lithos sarcophagos’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시신을 분해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점판암으로 관을 만들거나 관 둘레를 두르던 관습에서 나왔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000년대부터 목제, 도제관을 사용하였으나, 석관은 아시리아* 제국 때에야 사용되었다. 아슈르에서 출토된 기원전 9세기의 석관들은 비문에 의하여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장식은 없었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석관을 만들었고 기원전 6세기부터는 오리엔트의 영향으로 건조물을 모방한 모뉴멘털적인 석관도 출현한다. 기원전 4세기 중기 이후의 헬레니즘* 왕국 동부에서는 사면에 정교한 부조*장식이 덮이고 색이 선명하게 칠해진 석관이 나타났다. 이것은 후에 서부에서 발달한 삼면에만 조각을 한 ‘로마식’과 구별하여 ‘그리스식’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이탈리아의 서부 에트루리아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돌, 설화석고*, 테라코타 등으로 석관을 만들었다. 이 석관의 특징은 한쪽 면에만 부조를 했다는 것과 누워있는 형태의 죽은 사람의 모습을 관 뚜껑에 조각했다는 것으로, 이는 훗날 로마*와 초기 기독교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1세기말 또는 2세기초까지의 로마에서는 화장 풍습이 있어 매장용 석관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트로이 시대부터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도 매장이 증가해 3세기 중기에는 널리 퍼졌다. 그리스 본토에서 시작된 소위 ‘아티카식’ 석관이라 하는 것은 사면에 신화의 장면이나 화환이 조각되어 있고, 사자(死者) 형상의 부조와 정교한 관뚜껑 장식을 특징으로 하며 2~3세기에 서쪽 지방으로 전래되었다.
3세기의 기독교 석관은 조각 등에서 부활과 구원의 주제가 보일 뿐 이교도의 것과 양식상의 차이는 없다. 4세기경에는 아시아식에 기초한 작은 기둥 사이에 인물을 깊게 부조한 ‘기둥식’ 석관이 유행하였으며, 5세기경 기독교 석관에는 고전 그리스 전통이 부활한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석관은 그 표면에 신화, 전투, 꽃모양 장식 등이 모티브*로 사용된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공적활동의 모습이 새겨지거나 비문이 있는 경우도 많아 고고학, 미술사*, 종교, 사상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석관도 그 도상*을 제정기의 석관장식 부조에서 이어받은 경우가 많으며 중세 이후에도 장식 모티브*로 계승되어 르네상스의 조각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석기

석기 炻器 stoneware(영)

돌과 같이 단단하게 구워진 여러 색깔과 질감을 지닌 도자기. 섭씨 약 1,200도에서 1,280도 사이의 온도로 소성되며 대개 형태가 완성된 상태에서 유약을 씌운다. 미국 요업협회가 1950년에 발표한 분류법에는 석기를 ‘내화점토를 주성분으로 하여 구운 물건. 유약이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흡수량 0에서 10%까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 ‘자기’ 참조

석등

석등 石燈

불전 앞에서 불을 밝히기 위해 세우는 석조물.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공양을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은 하대석(下臺石), 중대석(中臺石, 간주석), 상대석(上臺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며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본적인 평면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각, 6각, 8각으로 되어 있다. 경전에 의하면 동제, 철제, 와제, 목제 등 다양한 종류의 재료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석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는 백제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부터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의 8각등 석등 형식을 계승,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앞 석등〉 〈법주사法住寺 사천왕석四天王石〉 등이 있다. 특히 간주석 대신에 쌍사자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유명하다. 또한 간주석에 장구통과 같이 마디가 있는 것도 있는데 주로 호남지역에 세워졌다.
이 밖에도 화엄사華嚴寺 4사자 3층석탑 앞의 석등은 간주석에 스님모습의 인물좌상을 안치시켜 특이하다. 고려시대 석등은 삼국시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퇴화해가는 경향을 띠며, 조선시대는 사원 건립의 위축과 함께 쇠퇴하고 말았다.

석채

석채 石彩

진하고 강하게 쓰는 색채. ‘진채(眞彩)’ 또는 ‘농채(濃彩)’와 같은 뜻으로,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석채화, 진채화, 농채화라 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개발된 그 특수한 광물질 채색 원료를 흔히 ‘당채(唐彩)’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