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하루 그만보기
쇠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
수대 미술 隋代美術
수隋(581~618)는 북조(北朝)의 북주北周에서 일어난 양견(文帝, 재위 581~604)이 남조(南朝)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세운 왕조. 율령제를 정비하는 등 획기적인 정책을 단행하여 중국 전국을 통일했으나, 둘째 아들 양광(陽帝, 재위 604~618)이 사치한 생활과 과도한 토목공사를 하고 고구려 원정까지 실패하여 내란이 일어나 838년에 멸망하였다.
건축:수도로 서경의 대흥성(唐代의 장안)과 동경의 낙양성이 새로 축성되어 동서, 남북 양방향으로 도로를 개통하고 궁성과 황성을 북쪽에 건립하고 광대한 외곽성을 건립하였다. 북주시대에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나, 문제의 즉위년 개황 원년(581)에 불교 부활의 칙명을 내렸다. 인수 원년(601), 인수 2년(602), 인수 4년(604) 3회에 걸쳐 전국의 명소와 사원에 110여기의 사리탑*, 즉 인수 사리탑을 축조하였다.
이 탑들의 기본은 목조 오층탑이며, 지하의 석함에 사리 용기를 넣었다. 문제는 개황 4년(584)에 장안과 황하를 연결하는 광통거廣通渠를, 개황 7년(587)에는 회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상양독山陽瀆을 개통했다. 이어 양제는 대업 원년(605)에 회수, 황하간의 통제거通濟渠를 완성하였고, 대업 4년에는 고구려 원정을 목적으로 황하와 탁군(북경 근교)사이에 영제거永濟渠를 개통하였다.
조각:조정의 불교 보호책에 따라 불교 석굴과 불상* 제작이 활발하였다. 천룡산 석굴의 제8굴의 상들, 제남부근의 옥함산 불곡사, 운문산 석굴 제1, 2굴, 타산 석굴 제2, 3굴이 수대의 석굴이다. 수나라 불상은 북제불의 강직하고 웅대한 면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당唐양식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보인다.
회화:수대에는 회화 부문에서 남북이 통합되었는데, 북조계의 화가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한다는 의미의 통합이었다. 수대 27년간의 화단은 남북조시대에 이어 장안화단(長安畵 壇)에서 많은 활동이 이루어졌다. 화가로는 장안의 정림사定林寺, 해각사海覺寺 등의 벽화를 그린 전자건展子虔(잔즈치엔), 정림사의 〈유마도維摩圖〉등을 그린 손상자孫尙子, 서역의 요철법*을 중국에 도입시킨 위지발질나尉遲拔質那 등이 존재하였으나, 이들의 화적은 남아있지 않다.
서예:북조의 검경과 남조의 유미가 융합한 것이 수대 서풍의 특징이다. 용장사비龍藏寺碑(586)는 남조계열이며, 조식묘비, 수공자묘비 등은 북조풍이다. 사경으로는 대반야경(603)과 현겁경(610)이 대표적 수경으로 간주된다.
공예:도자로는 월주요*越州窯계의 청자*가 전대에 이어 계속 제조되었고, 호남의 장사요, 안휘의 수주요에서도 청자가 생산되었다. 또한 투명유 백자*가 이정훈묘, 희위묘, 전덕원묘(611)에서도 출토되었고, 요지는 하남성 공현에서 발견되었다. 금속공예 중에서 우선 동경을 보면, 한식경(漢式鏡) 계통의 방격사신경(方格四神鏡)과 일광경, 내외구의 여백에 팔메트* 등 서아시아계 문양이 나타나는 당경의 선구가 되는 것이 있다. 금속공예는 북조 말기이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고, 금속 표면에 좁쌀 같은 문양을 새긴 세공은 수대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수도원 修道院 abbey(영)
수도사나 수녀들의 거주지로 수도회(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수도를 목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단체. 수도회에 속한 수사들은 회칙에 따라 청빈, 정결, 순종의 세 가지 서원을 한 다음 완덕을 쌓으며 자신과 모든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일함)의 종류에 따라 그 양식도 다르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세속을 피해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기 때문에 넓은 땅을 갖고 농업, 축산을 경영한다. 성당을 중심으로 안뜰을 끼고 사는 집이 방형(方形)으로 줄지어 있고 안뜰을 따라 회랑*이 둘러 있으며, 관상(觀想)과 사색에 적당한 장소가 마련된다. 동방교회의 은수사적(隱修士的)인 수도원이나 카마르드회 등은 각자가 조그만 독방을 가지고 있으며 성당과 식당만이 공동이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의 수도원은 도시 가운데 세워지게 되어 옛날과 같은 넓은 공간은 드물게 되었다.
수리야 Sūrya(범)
힌두교의 태양신으로, 베다 시대에는 12명의 태양신들이 있었으나 힌두교에서 수리야로 통합되었다. 베다 시대에는 태양과 달의 숭배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인 왕자들은 자신들의 가계(家系)가 라마로부터 시작되는 태양신의 가계(수리야밤사 Sūryavamsa)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의 아들인 수리야는 7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는데, 마부는 아침의 신인 아루나Aruna이다.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는 태양신 수리야는 지물*로 연꽃이나 곤봉 등을 들고 있으며 그의 배우자는 새벽의 여신인 우샤스Ushas이다. 오리사Orissa주의 코나락Konarak에는 13세기 중엽에 세워진 수리야 사원이 있는데, 신전 전체가 태양신의 마차 모양을 하고 있어 기단 벽에는 수레바퀴들이, 신전 앞에는 7마리의 말들이 조각되어 있다.
수마트라 미술 Sumatra Art(영)
인도네시아에서 수마트라섬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지만 자바섬에 비하면 현존하는 유물은 적은 편이다. 7세기 후반경 동쪽 해안의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흥기했던 슈리비자야Śrivijaya 왕국 시대의 유물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므시강 하류 지역에서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불상*(8~9세기)이 몇 점 출토되었다. 그 밖의 유물은 모두 11~12세기 이후에 속하는 불교 관계 유적이나 조각*인데, 이들 대부분은 인도-자바 미술, 특히 동부 자바 미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탄하리강 하류의 므아라, 잠비 유적(11~12세기)과 강 상류의 순계이, 란사트에서 출토된 거대한 석조 바이라바상(14세기) 및 자바의 케르타나가라왕Kertanagara이 수마트라로 보냈다는 명문*(銘文)이 있는 불공견색상(不空羂索像)이 중요하다. 또한 캄파르강 상류의 무아라, 다크스의 사원(12세기), 파단, 라와스 지방에 남아있는 사원과 밀교의 여러 상들, 구눈 트와에서 출토된 동제(銅製) 사비관음(四臂觀音, 1024년의 명문)상이 전하고 있다.
수묵화 水墨畵
채색을 하지 않고 먹물로만 그리는 동양회화 고유의 양식. 백묘*화를 토대로 발전한 수법. ‘수묵’이라는 말은 유상劉商(리우 상, 8세기 후반)의 시에서 보이고, 당말오대(唐末五代)에 활동했던 형호荊浩(싱 하오)의 《필법기*筆法記》에 나타나는 ‘수운묵장(水暈墨章)’의 약칭이라고도 한다. 백화*가 선 위주인데 반하여, 묵화*는 면 위주이고, 먹의 번짐으로 농담(명암)을 나타낸다. 그 용묵법(用墨法)에는 크게 파묵*, 발묵*이 있는데, 이 두 기법은 모두 먹의 성질을 이용하여 화가가 의도하지 못한 우연성의 효과를 얻게 되는 특징이 있어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전위적인 일품화(逸品畵)로 전개되었다.
수묵화는 성당(盛唐)시대에 산수화*가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성립되었고, 특히 산수화의 나무와 암석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기존의 채색위주의 화풍에서 수묵으로의 일대전환은 장자莊子가 제기한 “소박(素朴)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과 부합된다. 《필법기》에서 형호는 “무릇 채색의 훌륭함은 예부터 있었지만, 수묵화는 우리 당대에 처음 흥기한 것이다(隨類賦彩, 自古有能, 如水暈墨章, 興吾唐代)”라고 서술한 후 “진실한 생각이 뛰어나서 오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眞思卓然, 不貴五彩)…묵의 용법이 심오한 데까지 도달한다(用墨獨得玄門)”라는 말로 수묵화의 우위성을 강조하였다. 수묵화는 대상의 색채와 깊고 얕음에 근거하여 용묵을 변화시킴으로써 묵법이 실제로 색채와 같은 효과를 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그 후 오대(五代)에 이르면 도석인물 부문에 진출한 발묵계 수묵화가 특징적이고, 북송北宋 말기에는 사대부 화가에 의한 묵죽*, 묵매*를 비롯해 이른바 미법산수*가 나타났다. 남송南宋에서는 양해梁楷(량 카이), 목계牧谿(무 시), 옥간玉澗(위 지앤) 등에 의해 도석인물 이외에 산수, 화훼, 원숭이, 학, 노안(蘆雁) 등을 주제로 삼은 수묵화의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이 흐름은 원대(元代)에도 계승되어 원사대가*에 의해 고도의 표현기술이 완성되었다. 이들 수묵화의 영향은 명대(明代) 서위徐渭(쉬 웨이), 청대(淸代)의 팔대산인八大山人(빠따르산르언)에게로 이어졌으며 양주화파와 해상파에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의 수묵화가 전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여 나름대로의 양식으로 완성한 조선식의 수묵화가 그려졌다.
수월관음 水月觀音
관세음보살로서 33응신(應身) 중 하나.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또한 백의를 입고 있는 경우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고 한다.
수월관음은 물가의 바위에 수목(樹木), 대나무 등을 배경으로 하여 걸터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꽂힌 정병*과 연꽃, 산호초 등이 있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보타락산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중국에선 8세기 후반 당唐의 주방(周昉, 저우 황)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하여 송, 원대(宋元代)에 특히 유행하였다. 특히 돈황*에서 출토된 943년 채색 수월관음도는 현존하는 수월관음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예로 ‘수월관음’이라는 명문*이 있어 매우 의미가 깊다. 12세기 중기에는 수묵으로도 그려졌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는데, 1323년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수월관음도〉가 유명하다. 중국과는 달리 발 아래쪽에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시대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큰 원형 광배*를 지고 서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476년 무위사無爲寺 극락전 벽화가 있다.
수인 手印 mudrā(범)
‘인(印)’ ‘인상(印相)’ ‘밀인(密印)’ 등으로 불린다. 불교의 여러 존상의 본서(本誓) 즉 과거세(過去世)에 세웠던 서원(誓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 모양이다. 넓게는 손에 지물*을 든 모습도 포함된다. 원래 불전도*(佛傳圖)에 등장하는 석가의 손모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불의 경우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 선정인(禪定印), 항마인(降魔印), 전법륜인(轉法輪印)의 다섯 가지 수인을 주로 취하나 그 외에도 설법인(說法印), 논의인(論議印) 등이 있다.
대승불교의 여러 부처들은 대체로 이를 따랐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아미타정인 등 구품왕생(九品往生)과 관련하여 아홉 가지의 인을 새롭게 만들었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수인을 강조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권인(智拳印)과 보살, 명왕, 천부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손 모습이 나오게 되었다. 수인은 불상 종류에 따라 교리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상의 성격과 명칭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나 한국에서는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수지법 樹枝法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줄기, 가지, 잎 등을 표현하는 방법. 시대와 화파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기 때문에 작품의 연대와 양식의 변천을 판별하는 데 좋은 기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