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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표현주의

신표현주의 新表現主義
Neo-Expressionism(영)

‘신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어떠한 경위로 처음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이미 1982년에는 새로 등장한 독일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을 설명하는 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지어낸 다른 많은 미술 운동의 명칭이 그러하듯이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신표현주의로 분류되는 데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신표현주의는 미술사에 등장했던 모더니즘*과 개념미술*에 반발하여 나타난 미술이다.
신표현주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아 온 토양인 개념미술 형식에서 등을 돌린 후 이젤에 그림을 그리고, 주형을 뜨거나, 손으로 깎아 조각*을 만드는 전통적인 미술 제작 방식을 선택했다. 신표현주의는 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에서 영감을 찾은 반면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개념미술의 냉정함을 버렸다. 그리고 알레고리*나 제스처*적인 물감처리와 같이 이전에 금기시되던 수단을 통해 격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신표현주의는 널리 확산되었고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며 또 세대교체를 상징한다.
신표현주의 미술의 형식이나 내용을 일반화하여 설명하기는 힘들다. 신표현주의의 이미지는 신문의 헤드라인과 초현실주의*의 꿈에서부터 고대 신화와 삼류 소설의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 원천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독일 미술가들은 자국의 문화가 철저히 부정되어 버린 제2차세계대전 이후를 주제로 하기 위해서 20세기초의 표현주의* 기법을 답습했다. 슈나벨Julian Schnabel(1951~ )같은 미국 미술가들은 역사적 이미지를 절충하여 사용함으로써 매우 개인적이면서 암시성이 풍부한 작품을 창조했다.
그밖의 미술가들은 동시대 사건을 다루면서 날카로운 사회 비평을 가한 작품을 내놓았다. 전통적이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과 격렬하고 감정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회귀한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의 미술 시장이 폭발적인 호황을 누리는데 일조했고, 국제 미술계에서 누려왔던 미국 미술의 우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실경산수화

실경산수화 實景山水畵

우리나라의 자연경관과 명소를 소재로 그린 산수화*.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비교할 때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중기에 걸쳐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실경화들을 주로 지칭한다. 실경산수화는 고려시대에 전공지田拱之의 〈제주도〉(1007) 〈서산도瑞山圖〉를 비롯해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녕李寧의 〈예성강도〉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등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이어져 내려와 명승명소(名勝名所), 별서유거(別墅幽居), 야외아집(野外雅集) 등과 같은 유형의 회화를 형성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명승명소를 소재로 한 실경산수화는 중국 황실과 사신들의 선물용으로 빈번하게 제작된 〈금강산도金剛山圖〉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 〈한강도漢江圖〉 등과 같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 근처의 명소들을 비롯해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임지 근처의 특별히 좋은 경치들과 명산대첩의 절경들도 많이 그려졌다.
별서유거의 실경산수화는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의 〈망천도輞川圖〉와 주자(朱子)의 유거지를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등의 영향을 받아 사대부들이 자연을 벗삼아 전원생활을 즐기고 인격을 함양하던 처소나 별장 주위의 실경들을 선양하기 위해서 그린 것인데, 후손과 후학들이 정신적 고향으로 추앙하여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별서유거도 계열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인층 여항문인(閭巷文人)들에까지 파급되었다.
야외아집류의 실경산수화는 사대부들이 동료들과 함께 경치 좋은 장소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던 광경을 그림으로 기록해 길이 되새기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실경풍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중기까지 실경산수를 그린 작가로는 이녕을 비롯해 최경崔涇, 배련裵連, 안귀생安貴生, 이신흠李信欽, 이징李澄(1581~?), 김명국金明國(1600~?), 한시각韓時覺(1621~?), 조세걸曺世傑 등 모두가 화원이었으며, 조선중기부터 김시金禔(1524~1593), 이경윤李慶胤(1545~?), 조속趙涑(1595~1688)과 같은 문인화가들도 그리기 시작했다. 화폭은 현재 전하는 작품이 매우 드물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지만 기록적이고 기념적인 제작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화면구성의 토대 위에 동시대 정형산수화풍의 영향을 수용하며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경산수화는 17세기 후반경에 이르러 점차 문인화* 이념 등이 가미되고 남종화*법의 영향이 커지면서 진경산수화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실경산수화로는 작자미상의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 이신흠의 〈사천장팔경도斜川莊八景圖〉,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 한시각의 〈북관실경도北關實景圖〉, 작자미상의 〈함흥십경도咸興十景圖〉 등이 있다. 이러한 18~19세기 전반의 실경산수화는 당시 한국적인 화풍으로 부상했던 풍속화와 함께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쇠잔하고 만다.

실내장식

실내장식 室內裝飾
interior design(영)

건축물이나 선박, 항공기, 차량 등의 내부를 그 용도에 적합하도록 미학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나 그 기술을 말하며 실내계획 또는 실내구성이라고도 한다. 실내장식에서 말하는 공간은 추상적인 상태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 그 속에서 활동하는 생활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시실이나 무대 디자인 같은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실내의 구성요소로는 천장, 바닥, 벽, 각종 조직물 등의 고정 부문과 가구, 깔개, 커튼 등의 가동 부문이 있으며, 실내장식은 이들의 배치 외에도 조명과 색채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과거에는 건축물의 실내를 구조 자체와 분리하여 단순히 실내를 내장(內粧)한다는 의미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많았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실내는 생활의 실제와 밀착된 기능적이고도 조화를 이루는 공간구성이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사고가 발전함으로써 장식*(decoration)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설계로서의 기술이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건축과는 별도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분야도 독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실내장식이라는 용어는 장식보다는 디자인*(design)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실루엣

실루엣 silhouette(영, 프)

그림자 그림, 윤곽이 뚜렷한 물체의 영상.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아마추어 종이오리기 공예가였던 드 실루엣Etienne de Silhouette(1709~1767)이 재무장관으로 재임할 당시 극단적인 절약을 호소하여 초상화*도 그림자 그림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검은 종이를 가위로 잘라 엷은 색 대지(臺紙) 위에 붙인 값이 싼 옆모습 초상화를 제작하도록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이것은 모든 사물의 외곽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특히 윤곽이 뚜렷이 드러나는 흑백으로 된 회화와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표현한 여러 형태의 미술을 일컫는다. 복식용어로도 많이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는 의복의 세부적 디자인을 제외한 윤곽 또는 외형을 말한다.
사실 실루엣 기법은 이미 구석기시대의 동굴 미술, 이집트 미술*, 그리스*의 꽃병 그림 등에서부터 여러 시대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실루엣 초상화*가 크게 유행한 시기는 1750~1850년경으로 싼 값에 신속히 초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점 때문에 ‘가난한 자의 세밀화*’라고 불렸다. 실루엣은 신고전주의* 취향에 부합되어 인기가 상승했고 1800년 이후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었다. 후에 금박, 색채, 장식적 배경의 도입으로 그 장점이 손상되었고 1850년경 사진이 보급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현대미술에서의 실루엣은 특히 초현실주의*에서 종종 암시적인 수법으로 사용되었다.

실버 포인트

실버 포인트 silver point(영)

은첨필(銀尖筆). 금속의 뾰족한 끝 부분에 은을 용접한 소묘* 용구나 그것으로 그린 작품으로서 연필의 선구가 된다. 흰색 염료로 바탕칠이 된 종이, 양피지, 널빤지 위에 이것으로 선을 그으면 회색 선이 나타나는데 이 선은 미량의 은이 묻어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점점 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판화*의 밑그림 같은 섬세한 소묘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실정시대 미술

실정시대 미술 室町時代美術

→ 무로마치시대 미술

실크 스크린

실크 스크린 silk screen(영)

공판(孔版)에 의한 판화로 세리그래프(serigraph)라고도 한다. 원리는 등사판과 같으나 등사판이 종이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실크나 그 밖의 섬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인쇄기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천을 나무나 금속으로 된 틀에 넣어 고정시킨 다음 인쇄되지 않는 부분에 종이나 아교 또는 아라비아 고무액을 입혀 잉크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 다음 잉크를 부어 롤러나 스퀴지(고무로 만든 기구)로 누르면서 밀면 액이 묻지 않은 부분의 올 사이로 잉크가 통과되면서 인쇄가 된다.
다른 판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기 때문에 색상이 강하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며, 단순명쾌하고 강렬한 시각적 효과 때문에 일찍부터 포스터* 등 상업미술에 많이 이용되어 왔다. 실크 스크린은 다른 판법, 즉 목판화*, 동판화*, 석판화* 등이 모두 판재에 판을 만든 다음 전사(轉寫)에 의해 인쇄가 되는 것에 반해, 잉크가 스크린의 망점을 통과하여 인쇄되는 유일날염법(唯一捺染法)의 공정을 취하고 있으므로 다른 방식에 비하여 인쇄의 대상이 넓고 인쇄시 압력이 작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따라서 실크 스크린은 종이나 천은 물론 플라스틱, 목재, 금속판, 돌, 도자기, 유리 등 어떤 종류의 물건에도 인쇄가 가능하며, 특수 기계장치를 이용하면 곡면인쇄도 가능하다. 이런 장점 때문에 1960년대 이후 많은 작가들이 이를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팝 아트*의 경우에는 보편적인 표현기법이다. 현재는 화학섬유를 사용하는 일이 많으므로 실크 스크린이라는 말 대신 ‘스크린 프린트’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또 근래에는 천에 감광액을 발라 사진제판을 하는 방법도 개발되어 많이 쓰이고 있다.

실크로드

실크로드 Silk Road(영)

‘비단길’이라는 뜻으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는 고대의 동서 교통로를 지칭한다. 이 교역로를 통해 중국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이 운반되었다고 한데서 연유한 명칭이다. 독일의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Richthofen(1833~1905)이 서투르케스탄과 중국의 비단 무역을 중계하던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가리켜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βen’, 즉 ‘실크로드’라고 처음으로 명명했다(1877). 그 이후부터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이르는 교역로를 말하는데, 1910년 독일의 동양학자인 헤르만Herrmann은 이 길에 중앙아시아의 서쪽 지역인 시리아까지 포함시켰다.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시킨 캐러반 루트(隊商路)이다. 이 길들은 여러 갈래의 간선(幹線)이 있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중국의 장안長安에서 하서회랑(河西回廊)을 따라 들어가면 돈황*에 이른다. 돈황 이서 지역을 보통 중국에서는 서역이라고 부른다. 서역은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 지역인 동투르케스탄을 말한다.
중국에서 파미르 고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동투르케스탄의 중앙에 놓인 타림 분지의 북쪽에는 천산天山산맥이, 남쪽에는 곤륜崑崙산맥이 있는데 천산산맥의 북쪽 기슭의 길은 ‘천산북로(北路)’, 남쪽 기슭의 길은 ‘천산남로(南路)’ 혹은 ‘북도(北道)’라고 부르며,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은 ‘남도(南道)’라고 한다. 북도와 남도는 누란樓蘭에서 갈라지는데 북도의 중요 도시로는 투르판, 카라샤르, 쿠차, 악수, 툼슉, 카슈가르가 있으며 남도의 중요 도시로는 체르첸, 니야, 단단•위릭, 호탄을 들 수 있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인 서투르케스탄의 교역로 또한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파미르 고원에서 북상(北上)하면 페르가나 분지로 들어가게 되어 소그디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에까지 이른다. 파미르 고원에서 남하하면 인도의 간다라* 지역으로 연결되고 그대로 서진(西進)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도시인 쿤두즈, 발흐, 헤라트로 이어진다. 아프가니스탄의 메르브와 헤라트에서 다시 서진하면 이란 고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서무역은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하는 이 교역로뿐만 아니라 북쪽의 스텝 지대를 관통하는 스텝로(초원의 길)와 남쪽의 해로(海路)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으므로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이 3개의 교역로를 모두 지칭하기도 한다.

→ ‘중앙아시아미술’ 참조

실파 샤스트라

실파 샤스트라 śilpa śāstra(범)

인도 건축 장인들의 실기 논서를 말한다.

→ ‘샤스트라’ 참조

실험미술

실험미술 實驗美術
experimental art(영)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대담한’ ‘이상스러운’ ‘자극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 ‘실험적’이라는 말은 ‘아방가르드*’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것은 미술비평*에서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예술가들이 뭔가 가치있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실제로 작품을 제작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으로는 ‘시운전, 미완성작, 과도기적인 것’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 예로 곰브리치Ernst Gombrich(1909~ )는 20세기의 모든 미술을 총괄해서 시험적, 과도기적, 잠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험미술’이라는 항목으로 묶었다.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예술에서의 실험은 과학에서의 실험과 유사하다고 믿었다. 그는 회화는 과학이고 풍경화는 자연철학의 한 지류라고 주장했다. 바운Stephan Baun도 유사한 견해를 가졌으며,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도 미술 작업을 ‘조사 연구’라고 부르며 의도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과학에서의 실험이란 이론이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통제된 여건 하에서 테스트하는 것으로서 우연의 요인을 최소화하며 놀이의 요소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과학에서의 실험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지만 예술가들의 실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 실험과 예술적 실험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셰난M. Chanan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예술도 과학과 같으나 그 결과를 예측도, 측정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이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