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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전기 미술

헤이안 전기 미술 平安時代前期美術

794년에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때부터 견당사(遣唐寺)가 폐지된 894년에 이르는 1세기 동안을 헤이안시대 전기 혹은 ‘고우닌(弘仁), 조오깡(貞觀)시대’라고 한다. 헤이안시대의 환무桓武 천황은 부패한 도시 불교의 중심지인 나라奈良를 버리고 헤이안으로 이전, 동사(東寺)와 서사(西寺)를 지었다. 사이초最澄(767~822)와 구카이空海(774~835)는 당唐에 유학하고 돌아와서 헤이안시대 말까지 불교계의 지배적인 세력이 된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을 세웠다. 이 시대에도 당의 영향이 강하였지만 점차 독자적인 양식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건축:헤이안시대 초기의 건축 중 남아 있는 것은 실생사室生寺의 금당金堂과 오층탑(五層塔) 정도이다. 그러나 신사(神社)건축에 중국의 건축양식이 적용되어 춘일조(春日造), 유조(流造), 팔번조(八幡造), 일길조(日吉造) 등의 새로운 형식이 생겨났다.
조각: 당 조각의 영향에다 일본의 기호가 첨가된 조각이 제작되었다. 불상*제작에 주로 건칠(乾漆)이나 소조*(塑彫)의 기법이 쓰여지고 표면에는 채색을 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한편으로는 민간의 수요에 따라 간소한 목조로 된 상도 만들어졌다. 양식적으로는 입당승(入唐僧)에 의해 새로운 불교미술이 전래됐고, 신상*(神像)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 수법과 특징은 불상과 공통점이 많아 불상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회화:구카이가 당에서 귀국하고 돌아올 때 가져온 〈진언오조상眞言五祖像〉에 일본에서 추가로 그린 용맹(勇猛), 용지(勇智)의 상을 합하여 된 〈진언칠조상眞言七祖像〉, 자주색의 천에 금은니*로 제존(諸尊)을 그린 신호사神護寺의 〈양계만다라兩界曼茶羅〉 등이 헤이안 전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서예:헤이안시대 전기의 서예를 대표하는 사람은 당대의 삼필(三筆)로 일컬어지던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 차아嵯峨 천황, 귤일세橘逸勢이다. 이들은 당대(唐代)의 서풍을 바탕으로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냈다.

헤이안 후기 미술

헤이안 후기 미술 平安時代後期美術

견당사(遣唐寺)가 정지된 894년부터 헤이씨平氏가 멸망한 1185년까지 약 300년간의 미술을 말한다. 이 시대는 후지와라(藤原)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궁정 귀족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기이다. 견당사가 폐지됨에 따라 중국문화의 영향이 적어진데다가, 일본 자체에서도 이제까지 받아들인 중국문화를 소화하여 독자적 문화를 이룩할 만한 힘이 축적된 점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일본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나게 되었다.
건축:교토京都의 궁궐, 우지宇治의 뵤도인平等院이라는 절의 봉황당(鳳凰堂)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또한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마음에서 만든 귀족들의 주택인 신덴 즈쿠리(寢殿造)라고 하는 일본화된 건축양식이 만들어진 것이 중요하다.
조각:귀족들의 우아한 정취적인 취향을 짙게 반영시켜 일본화된 고전양식을 완성하였다. 전기에 사용되던 통나무를 재료로 하여 조각하던 기법 대신에 엷은 나무판을 포개서 만든 목조 기술이 등장하였다. 이 이면에는 분업과 대량 제작이라는 기술적 요인이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조초定朝가 제작한 〈뵤도인의 아미타여래상〉을 들 수 있다.
회화:10세기 원신源信에 의해 고취된 정토사상은 아미타정토(阿彌陀淨土)로의 동경으로 발현되어 장식경(裝飾經), 내영도(來迎圖) 등이 다수 제작되었다. 또한 문학의 성행과 함께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原氏物語繪卷) 등 에마키모노*(繪卷物)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서예:왕희지체에 획을 한층 둥글게 쓴 소야도풍小野道風에 의해 일본식 서체의 기초가 다져졌다. 이후 등원좌리藤原佐理는 이를 더욱 전개시켰고, 그 뒤에 등원행성藤原行成이 나와 도풍道風과 좌리佐理의 서풍에 세련미를 더하고 전체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당대 서풍의 전형을 완성하였다.
공예: 칠공으로는 칠기* 표면에 금, 은가루를 뿌리는 나전이 발달하였고, 금속공예로는 얇은 원형 등에 화조, 새 등 일본적인 문양을 새긴 일본식 거울인 화경(和鏡)이 생겼다. 또한 경전을 후세에 남겨 공덕을 얻으려고 경을 경통(經筒)에 넣어 땅속에 묻은 경총(經塚)에서 경통, 불상*, 거울 등의 금공예품이 많이 발굴되었다.

헬레니즘 미술

헬레니즘 미술 Hellenism Art(영)

그리스어 ‘hellenismos(본래는 ‘그리스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의 뜻)’는 이미 고대에 있어서도 시대에 따라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근대어인 헬레니즘도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시대 개념으로서 쓰이는 경우에도 연구 분야나 학설에 따라서 다른 시대의 구획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 고고학이나 미술사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에서부터 악티움 전쟁(기원전 31)까지 약 300년간에 걸친 그리스 회화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대의 그리스 문화는 동방을 향해서 광대한 범위로 확산되고, 그 영향은 인더스 강 유역에까지 파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후계자는 각지에 왕국을 세웠는데, 셀레우코스 조의 수도 안티오키아,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종래 폴리스의 개념으로는 더이상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대도시(코스모 폴리스)로 발전하여 헬레니즘 문화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미술의 성격도 변하고 신앙과의 관련도 약해졌으며 미술 작품은 지배자의 권력과시, 혹은 단순한 감상을 위해서 제작되게 되었다.
또한 타민족의 문화로부터 영향도 받아, 헬레니즘 시대 미술의 흐름은 더이상 이전같이 명확한 양식 전개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타문화의 그리스화라는 현상을 도외시하면 초기(기원전 330~200), 성기(기원전 200~150), 후기(기원전 150~30)의 3단계로 구분되어 양식 전개를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건축에서는 풍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지배하고 그 장대함을 과시하는 것이 주된 경향이었다. 그 예는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의 유구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건물의 대부분은 아탈로스Attalos 왕가가 번영했던 기원전 250~150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성기 헬레니즘 조형(造形)의 힘에 의한 공간의 지배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가 있다. 원래 불규칙한 언덕으로 되어 있던 지형이 많은 노력을 들여 여러 단(段)의 테라스로 변화되고, 가능한 한 질서를 추구해 신전, 제단, 극장, 회랑, 도서관, 왕궁 등의 모뉴멘털한 구조물을 세웠다. 같은 식으로 질서에 의한 광대한 공간의 지배는 로도스 섬에 있는 린도스의 여신 아테나의 성역, 코스 섬에 있는 아스클레오피오스 성역 등의 건축군에서도 명백히 볼 수가 있다. 대도시에 사는 유복한 시민의 주거도 점차로 호사스럽게 되어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주랑에 둘러싸인 안뜰이나 더 나아가 정원도 갖게 되었다.
헬레니즘 미술 양식의 전개는 뛰어난 유품이 많이 있는 조각에서 가장 명확하게 살펴 볼 수가 있다. 초기에는 리시포스Lysippos의 영향 하에서 발전했고, 그의 세 아들 에우티크라테스, 다이포스, 보에다스도 활약했었다. 로마 시대의 많은 카피가 남아 있는 <안티오키아의 도시 여신>(기원전 300년경)의 제작자도 리시포스의 제자인 에우티키데스였다. <안티움의 소녀>도 볼륨감있고 질박한 이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성기에는 힘찬 독창성에 넘친 조형의 에너지가 분출하였다. 부조*에 있어서 상(象)과 공간은 회화적이라 할 만큼 긴장된 관계를 이루고, 환조에 있어서도 상이 방출하는 에너지는 주위의 공간을 압도한다.
후기에는 또다시 위대한 과거를 돌이키는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어났다. <밀로의 비너스>는 이 시대의 초기에 해당하고, <키레네의 아프로디테>는 고전주의적 경향이 강한 기원전 100년경의 원작에 의한 로마 시대의 모작으로 생각된다. 초상은 헬레니즘 조각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거의가 로마 시대의 모작이지만, 시인, 웅변가, 사상가, 지배자들의 많은 초상이 남아 있고 시대에 따른 양식*의 변화도 보인다.
초기의 조각가 폴리에우크테스가 제작한 데모스테네스의 초상에서는 사실을 꾀하면서도 여전히 볼륨감 있는 조형에 의한 이상화를 볼 수 있는데 비해, 후기의 작품에는 상의 두부(頭部)에만 사실의 정력을 집중한 로마 초상 조각의 선구를 엿볼 수가 있다. 차차로 호장함을 더해가고 있던 헬레니즘의 궁전, 공공 건축, 그리고 또 시민의 주택들은 화려한 벽화*나 대형의 판화*(版畵)로 장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들은 오늘날 다 없어졌지만 마케도니아의 펠라나 델로스섬, 또한 폼페이 출토의 디오스 코리테스의 서명이 있는 마루면 모자이크에서 그 편린(片鱗)을 엿볼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폼페이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말의 회화*를 모자이크*로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극적인 주제, 격한 움직임, 명암의 효과, 원근법에 의한 거리의 표현 등 헬레니즘 회화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등 베수비오 화산 주변의 도시들과 로마 제정 초기의 빌라를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는, 헬레니즘기 벽화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공예품들 중, 타나그라 인형(人形)이라고 불리는 가련한 모습의 테라코타 소상에서는 대형 조각과 같은 양식의 전개를 추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당시 여성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화례에서는 탁월한 초상예술의 반영이 보인다. 풍부하게 장식된 귀금속이나 브론즈로 만든 용기가 수 없이 만들어졌고 도예품은 간소했으며, 대량 생산된 ‘메가라식 배(杯)’ ‘사모스식 배’라고 불리는 작은 그릇에는 흑색 바탕 위에 압인에 의한 부조 장식이 있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끝에 숙적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동지중해역에 지배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최후까지 저항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마저 악티움 전투에서 패하자 헬레니즘의 세계는 붕괴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미술 최후의 고전주의적 경향은 그리스 문화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새 지배자에게 이어져, 공화정 말기 및 제정 초기의 로마에서 눈부시게 전개되었다.

현대 도예

현대 도예 現代陶藝
modern ceramics(영)

공예* 용어로 특수 도예라고도 한다. 요업 제품 중 주성분이 인공 원료 또는 합성 원료인 것을 가리킨다. 천연 원료를 주성분으로 하는 보통의 도자기를 클래식 세라믹이라고 불러 이것과 구별한다. 현대 도예에는 신요업 제품인 뉴 세라믹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고주파 절연재료로서 개발된 스테아타이트 자기(磁器), 포르스테라이트 자기, 전자계산기의 메모리 코어, 컬러 텔레비전 용의 페라이트 등이 있다.

현왕탱화

현왕탱화 現王幀畵

사람이 죽어서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현왕여래(現王如來)를 중심으로 묘사한 불교탱화의 하나이다. 보통 약사전의 현왕단에 모셔지고 그 내용은 중앙에 현왕여래와 그 두광*(頭光)의 좌우에 동자상, 바로 아래쪽 좌우에 대륜성왕(大輪聖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묘사되고 그 아래에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시립(侍立)하는 구도를 보인다.

현존성

현존성 現存性 presentness(영)

현존성은 프리드Michael Fried의 리터럴 아트*와 대상성* 개념에 관련하여 대상(객체 또는 작품)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얻어내는 일종의 모더니즘*적 세계관의 일부를 이루는 개념이다. 따라서 현존성에서의 열망은 곧 대상을 접함에 있어 대상성의 상태로 전락하지 않음으로써, 또한 환영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리터럴 아트의 현존에 대한 체험은 기본적으로 극적 효과, 혹은 극적 특질이며 일종의 무대에서의 현존에 따른다. 그것은 리터럴리스트의 작품이 관람자를 필요로 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것을 인지하게 해 그에 맞추어 작용함으로써 충족될 때 현존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관람자가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체험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의 현존은 상황이나 사건의 전개에 따른 극적인 지속 개념에 관련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은 무한히 짧은 순간일지라도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작품의 깊이와 충만함을 체험하며 영원한 확신을 얻게 되는 순간성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연극성의 상태를 벗어날 때 현존성을 이루어낼 수 있다.

협시

협시 脇侍

불상*에서 본존인 여래(如來)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상(像). ‘협시(挾侍)’ ‘협사(脇士)’ ‘협립(脇立)’이라고도 한다. 각기의 정토(淨土)를 가진 여래의 보처보살(補處菩薩)이다. 예를 들면 석가*여래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즉 석가삼존釋迦三尊), 아미타여래는 관음보살*, 세지보살(즉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 약사여래는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즉 약사삼존藥師三尊)을 협시로 한다. 또한 명왕*부(明王部)와 천부(天部)에도 협시가 있는데, 부동명왕(不動明王)은 긍갈라동자(矜羯羅童子)와 제타가동자(制咤迦童子),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은 길상천(吉祥天)과 선이사동자(善膩師童子)가 있다.

형사

형사 形似

동양화에서 대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닮도록 표현하는 것. 사의*(寫意)에 대립되는 말로 육법*에 있어서의 응물상형(應物象形)이 여기에 해당한다. 화가의 주관이나 전통성이 중시되는 문인화*에서 형사는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형사의 단계에 멈추는 것은 평범한 화가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즉 수묵화*와 기운론(氣韻論)의 진전과 문인화의 진출에 의해 형사는 통상 직업화가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경시되었고, 나아가 부정하는 풍조도 일어났다.
송대(宋代) 이후에 형사와 신사*의 관계가 전도되어 형사는 회화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나 방법으로 추구되었다. 그러나 형사는 중국 회화가 자연주의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고대에는 매우 중요했던 개념이다. ‘신(神)’은 객관대상의 ‘형(形)’ 안에 존재한다. ‘형’이 없으면 ‘신’도 묘출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는 ‘이형사신(以形寫神;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형성

형성 形成 formation(영) Gestaltung(독)

미학* 상의 용어. 미적 세계의 형상 구성(形象構成), 즉 정신이 대상에 미적으로 동화됨으로써 구체적으로 감정에 적합한 형태를 낳는 것을 말한다. 즉 미적 내용*이 고유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형식

형식 形式 form(영)

형식이란 예술작품의 외부적 측면, 즉 내용*이 표현되는 구조, 요소들과 그 요소들 서로의 관계의 전체성을 말한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형식의 개념은 예술* 일반과 동일하다. 전체로서의 예술은 종교나 학문 또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식이나 사회적 의식의 형식들을 의미한다. 예술은 인간을 통해 세계를 미적으로 동화(同化)시키는 실천적 형식인 동시에 정신적인 형식이다. 예술은 무엇보다 자신의 표현의 감성을 통하여 인식된다. 철학과 학문이 별개의 사실로부터 추상화되고 사물의 본질을 보편적, 개념적으로 제시하는 반면에, 예술은 자신의 내용을 직관을 매개로 하여 형상화하고 그것을 눈, 귀 등을 통하여 수용한다.
두번째 의미에서 형식이란 다양한 예술(조각, 회화, 음악, 시 등) 혹은 그 예술 장르, 즉 음악에서는 둔주곡, 조곡, 교향악의 형식을, 시에서는 서사시, 서정시, 드라마의 형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식은 매체*나 인간의 ‘본성’에 인간이 현실을 수용하고 모방하는(시각, 청각, 표상의) 감각에 근거를 두고 있거나 또는 배우나 음유 시인 등으로서의 인간의 재능에 근거를 두고 있다(괴테). 무엇보다도 그 장르*는 역사의 과정에서 극복되고 변화되는 뛰어나고도 독특한 예술적 성취를 통해서 각인된다. 그러한 성취는 예를 들면 서사시(호머)의 창조와 제2, 제3 배우들의 도입(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이나 교향악곡의 도입(하이든, 모차르트)을 통한 드라마의 창조를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예술적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에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내용은 형식의 지속성에 대한 자신의 더 커다란 유연성을 통하여 구별된다. 그로부터 새로운 내용은 자신의 고유한 자신에게만 적합한 형식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 결과가 종종 전통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셋째로 예술적 형식의 의미는 개별 예술작품 속에서 성취되는 이중적 기능에서 분명해진다. 예술작품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형식은 선택과 배치의 과제, 즉 내용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갖는다. 수용의 측면에서 그것은 예술가와 청중의 의사소통을 매개한다. 첫번째 경우에서 형식은 예술작품의 독자성, 조화, 완결성을 구성하고 두번째 경우에는 환기, 즉 예술작품 속에 표현된 내용의 지적이고도 감정적인 추체험을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