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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우

화우 畵牛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농경사회였던 동양에서는 소가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상징하여, 오랜 역사동안 중심화제로서 그려졌다. 암각화(岩刻)나 도자기 그림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회화적 가치가 풍부한 소 그림으로 이른 시기의 것은 당대(唐代) 초기 이수묘(李壽墓)의 벽화*가 있다. 당대 중기(8세기 후반)에는 대숭戴嵩(따이 충)과 같은 소그림 전문 화가가 출현하기도 했다. 대숭은 전원 풍경 속에 노니는 물소를 그렸는데, 이것은 강남지방의 풍물로서 화북의 말 그림(화마*)에 필적되는 것이었다.
남송南宋 때에는 선종화*(禪宗畵)가 성행하였는데, 다양한 선종화의 소재에는 수행자의 향상 단계를 상징한 <십우도十牛圖> 혹은 화면에 자성자목(自性自牧)의 뜻을 부여한 소 그림이 많이 있었다. 남송 화원(畵院) 화가들도 소 그림을 많이 그려 이당李唐(리 탕), 이적李迪(리 띠), 염차평閻次平(이엔 츠핑) 등이 유명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소그림이 성행해 김시金禔의 <와우臥牛> <황우黃牛> 등이 남아있다. 김시의 소그림은 남송대 선종화의 영향도 있으나, 구도나 필법 등에 특유의 한국적 정취가 잘 표현되어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시의 화풍은 이경윤李慶胤, 이징李澄, 손자인 김식金埴, 윤두서尹斗緖에까지 이어져, 소를 표현하는 기본화풍으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현실적인 소를 소재로 그리면서도, 소를 통해 도가적(道家的) 삶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자연을 벗삼아 은일자적하기를 염원하였던 문인들은 소가 지니고 있는 자적함과 평화로운 분위기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여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경윤이 그린 <기우취적騎牛吹笛>, 김식의 <우도牛圖> <고목우枯木牛> <수하모우樹下母牛>, 윤두서의 <와우臥牛>, 조영석趙榮祏의 <우도牛圖>(밑그림) 등이 대표적이다.

화인

화인 畵引

3권으로 만들어진 중국의 회화 논저. 명明의 고응원顧凝遠(꾸닝위앤, 1580~1645)이 숭정 10년(崇禎, 1637)에 지은 것이다. 고응원의 자(字)는 청하淸霞로 고구사顧九思의 손자이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그림의 이론에도 정통하였으며,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을 본받으면서도 형호荊浩(싱 하오), 관동關同(꾸완 통) 등의 영향도 받았다.
이 책은 《제자장서지諸家藏書志》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벽강吳廦疆의 《화원비급畵苑秘芨》에서 볼 수 있고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에 7편의 인용문이 있다. 보통은 〈흥치(興致)〉 〈기운(氣韻)〉 〈필묵(筆墨)〉 〈생졸(生拙)〉 〈고윤(枯潤)〉 〈취세(取勢)〉 〈화수(畵水)〉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생졸(익숙하지 않음과 공교하지 않음)〉편은 붓 쓰는 법에 대하여 쓴 것으로, “그림은 숙(익숙함) 밖의 생(익숙하지 않음)을 구하여야 한다… 또 공교한 것(工)은 졸한 것(拙)만 못하다”라고 주장하며 “생은 거친 기(氣)가 없어 문채(文彩)가 있는 것이니 이른바 문인의 필(筆)이요, 졸(拙)은 작기(作氣)가 없어 우아한 것이니 이른바 아취있는 사람의 깊은 운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윤(마름과 윤택함)〉편은 먹 쓰는 방법에 대하여 저술한 것이다. 그는 “먹이 지나치게 메마르면 기운이 없고 기운만을 구하면 방종하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메마름(枯)과 자윤함(潤)의 예술효과를 획득하는 관건은 조화에 있다함을 제기하였다.

화정파

화정파 華亭派

명말(明末)의 화정華亭(上海의 松江) 출신 문인화가 고정의顧正誼(꾸 즈엉이)가 개창한 화파. 송강파松江波의 개창자인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역시 화정 출신이어서 송강파를 화정파로 말하는 일도 간혹 있다. 이 화파는 고정의가 배운 원사대가*의 영향이 강하다고 하나, 실은 동기창의 혁신적 산수화*양식과 관련되는 바가 많다. 명말의 전반적 풍조였던 환상적이고 기이한 화풍이 특색이다. 이 화파에는 고정의의 아들인 고원경顧元慶(꾸 위앤칭)과 조카 고의덕顧懿德(꾸 이떠) 등이 있다.

화조화

화조화 花鳥畵

꽃과 새를 그린 동양화의 한 화목(畵目). 화론서에 따라서는 꽃과 새 외에 영모, 초충, 어해 등을 꽃나무와 함께 그린 그림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 전부터 이러한 그림은 많이 있었지만 중국 당대(唐代)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화목으로 분류되었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화조화의 두 가지 양식이 황전黃筌(후앙 취앤)과 서희徐熙(쉬시)에 의해 확립되었다.
황전은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색으로 바로 그리는 몰골법*과 짙은 채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고 사실적인 화조화를 그렸다. 이에 비해 서희는 묵으로 형태를 대강 그린 다음 담채로 채색을 하였다. 따라서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는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서 “황전은 부귀(富貴)하고, 서희는 야일(野逸)하다”라고 논평했다. 황전의 그림은 원체화*에, 서희의 그림은 문인화*에 영향을 끼쳤다. 북송北宋의 《선화화보*》 〈화조서론花鳥叙論〉에는 화조화가 열 가지 화목 중의 하나로 분류되어 그 지위가 이미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역대에 걸쳐서 화조화가는 많이 배출되었는데, 예를 들어 당대(唐代)에는 설직薛稷(쉬에 지, 학(鶴)에 뛰어남), 변란邊鸞(삐앤 루안, 공작(孔雀)에 뛰어남), 도광윤刀光胤(따오 꾸앙인, 화죽에 뛰어남) 등이 있고, 오대(五代)에는 곽건운郭乾暉(구어 깐후에이, 매(鷹)에 뛰어남), 황전黃筌(후앙 취앤, 화조(花鳥)에 뛰어남), 서희徐熙(쉬 시, 화조에 뛰어남) 등이, 북송에는 조창趙昌(자오 츠앙, 화(花)에 뛰어남), 임춘林春(린 츠운, 화조에 뛰어남), 이적李迪(리 띠, 날짐승(禽)에 뛰어남) 등이, 남송南宋에는 오병吳炳(우 빙, 鴛, 鴦에 뛰어남), 왕면王冕(우앙 미앤, 1287~1359, 매화(梅花)에 뛰어남), 진순陳淳(츠언 쉰, 묵화(墨花)에 뛰어남), 서위徐渭(쉬 에이, 묵화(墨花)에 뛰어남) 등, 청대(淸代)에는 팔대산인八大山人(빠따르산르언, 물고기(魚)에 뛰어남), 운수평惲壽平(윈 서우 핑, 화(花)에 뛰어남), 화암華嵒(화 이앤, 새(鳥)에 뛰어남) 등, 그리고 근대엔 오창석吳昌碩(우 츠앙스, 1844~1927, 화훼(花卉)에 뛰어남) 등 모두 일대의 명수들이 계속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화조화가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화가로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이암李巖, 조속趙涑(1595~1688), 심사정沈師正(1707~1769), 장승업張承業(1843~1897) 등이 있다.

→ ‘사군자’ 참조

화중구우

화중구우 畵中九友

그림을 통한 아홉 친구.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양문총楊文驄, 정가수程嘉燧(쳉 찌아수이), 장학증張學曾, 변문유卞文瑜, 소미邵彌(샤오 미), 이유방李流芳(리어 우황),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 왕감王鑑(우앙 지엔, 1598~1677) 등 9명의 화가에 대한 총칭이다. 청초(淸初)에 오위업吳偉業이 지은 《화중구우가畵中九友歌》에 보인다. 9명의 화가 중 중심인물은 동기창인데, 그는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주창하면서 상남폄북*(尙南貶北)론을 제기하였다.
이후 동기창의 주장이 화단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의고주의(擬古主義)’가 팽배하였다. 왕시민 역시 동기창의 남북종론을 충실히 따랐고, 청초의 의고사상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왕시민의 그림은 동기창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것이었고 동기창과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화중구우는 명말(明末)의 동기창이 골간이 되어 남종화*를 숭상하였고 당시와 후세의 화단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화중십철

화중십철 畵中十哲

중국 청대(淸代) 누동화파*에 속했던 10명의 화가. 즉 동방달董邦達(똥 방따), 고위高爲, 고봉한高鳳翰, 이세탁李世倬(리 스주어, ?~1770), 장붕충張鵬翀(즈앙 펑츠옹), 이사중李師中, 왕연격王延格, 진가락陳嘉樂, 장사영張士英(즈앙 씨닝), 시신柴愼 등을 가리킨다.

화지

화지 畵旨

중국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펴낸 화론서 1권. 원래는 《용대별집容臺別集》 4권에 실려 있었다(부분 조목은 막시룡莫是龍(모 스롱)이 편찬한 《화설畵說》에도 실려 있음). 내용은 자신의 그림 및 옛 그림에 대한 제발*(題跋)이 많고, 화법 품평 감상에 대한 논술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기창이 주장한 남북종론(南北宗論)과 기운론(氣韻論)이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기창은 이 책에서 “선가(禪家)에 남북이종(南北二宗)이 있어 당唐나라 때 처음 나뉘어 졌는데, 그림도 당나라 때 남북이종으로 나뉘어 졌다. 북종은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이소도李昭道(리 사오따오) 부자의 착색산수가 유전하여 송의 조간趙幹(자오 간), 조백구趙伯駒(자오 뿌어쥐), 조백숙趙伯驌이 되었다가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에 이르렀고, 남종은 곧 왕마힐王摩詰이 처음으로 선담법(渲淡法)을 써서 구작(鉤斫)의 법을 일변시킨 이래 그것이 전하여 장조張璪(즈엉 차오), 형호荊浩(싱 하오), 관동關同(꾸완 똥), 곽충서郭忠恕(구어 쫑쉬),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미불米芾(미 후),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이 되었다가 원사대가*에 이르렀는데, 이는 육조(六祖)의 뒤에 마구(馬駒), 운문(雲門), 임제(臨濟)의 자손들이 성하고 북종은 쇠미해진 것과 같다”고 하며 남북종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왕마힐은 ‘남종’이고 이사훈 부자는 ‘북종’이며 남종 산수화의 미적 가치가 북종 산수화보다 높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상남폄북*의 미학사상으로 문인화*파의 미학사상을 대변하는 것이다(남북종론은 막시룡의 《화설》에도 실려 있어 막시룡의 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동기창은 기운(氣韻)의 타고난 성질에 대해서 북송北宋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가 말한 “기운은 배울 수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따름으로써 기운론을 설파하고 있다. 동기창의 남북종론과 기운론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훼도

화훼도 花卉圖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짐승에 꽃이나 나무를 배치하는 화조화*와는 달리 꽃이나 풀만 그리는 것이다. 화초도에 속하며 절지(折枝)를 포함한 꽃그림을 총칭한다. 초충도*를 포괄하기도 한다. 서아시아가 기원으로 중국으로는 남북조(南北朝)~당대(唐代)에 전파되었다. 특히 연화, 모란, 부용 등 각종의 덩굴풀 문양은 장식문양으로 발전하였다. 중국 회화사상 ‘화훼’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840년경에 쓰여진 주경현朱景玄(주 징시앤)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서이다. 그뒤 화훼라는 화목(畵目)은 화조화*나 소과도(蔬果圖), 초충도 등과 함께 소개되다가, 청대(淸代)에 이르러 화훼만을 다룬 화보로 추일계鄒一桂(처우 이지에, 1686~1772)의 《소산화보小山畵譜》가 나왔다. 독립된 화제로서 그려진 오래된 예로 남조(南朝) 양梁의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가 그렸다는 요철화(凹凸花)와 초당(初唐) 은중용殷仲容(인 쫑롱)이 그린 묵화(墨畵) 등이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화훼도가 본격적인 발달을 보인 것은 오대(五代)와 북송北宋에 걸쳐서이다. 이 때는 가지 하나만을 그리는 절지화*(折枝花)와 뿌리에서부터 전체를 다 그리는 전주화(全株花)의 구별이 생겼고, 일반적으로 구륵법이 사용되었다.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진 수묵 화훼도는 문인화*가 발달됨에 따라 등장하게 되었다. 사군자*도 엄격히 말하자면 이 범주에 속한다. 문인화와 선화(禪畵)의 발달로 인한 수묵화훼도의 전통은 명대(明代) 중기의 심주沈周(선 저우), 서위徐渭(쉬 웨이) 등에 이어졌고, 청대의 팔대산인八大山人(빠따르산르언)이나 양주팔괴*(揚州八怪)에 이어졌다. 표현 기법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 구륵을 배제한 몰골채색법(沒骨彩色法), 수묵법(水墨法), 백묘법*(白描法) 등이 있다.

환경미술

환경미술 環境美術
Environment Art(영)

작품을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 생각지 않고 언제나 그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 현대의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수법의 전시 형태를 요구한다. 따라서 작품과 관람자와의 전체적인 교류를 의도하여, 보는 사람의 주위를 작품(회화*, 조각*, 오브제* 등)으로 둘러싸고, 때로는 소리, 빛 따위도 가해서 독특하게 꾸민 환경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다다이스트( →‘다다’ 참조)인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의 작품인 <메르츠바우*Mertzbau>나 초현실주의*의 대규모적인 전시회도 환경미술에 속한다.
그러나 환경미술이 본격적으로 시도된 곳은 미국으로 그 기원은 이미 추상표현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경향의 작품들은 대형화되어, 관람자는 색깔을 바라보기보다는 그것에 압도되어 ‘경험’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관람자는 뉴만Barnett Newman(1905~1970)이나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의 거대한 화면에 둘러싸인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같은 무렵에 건축가 키슬러Fredrick Kiesler(1890~1965)는 회화, 조각, 건축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했고, 네벨슨Louise Nevelson(1899~1988)은 조각을 벽 전체로 확대시켰으며, 허버트 퍼버Herbert Ferber는 ‘조각의 방’이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1950년대 말 몇몇 젊은 작가들은 연극적인 이벤트와 해프닝*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것들은 모두 환경미술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그 연원은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액션 페인팅*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살아 있는 환경 속에 실제의 인간과 실제의 대상물을 결합시킴으로써 해프닝을 개인주의적이고 고립적인 미술 작품으로보다는 전면적인 예술 환경을 새롭게 강조하는 경향으로 유도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예술관이 잘 나타난 것은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 )의 <상점>이다. 그는 예술과 생활의 총체를 이끌어내기 위해 실제로 상점을 구입, 거기에서 작품을 제작, 상품도 진열해 놓고 판매했다. 그는 또한 거대한 기둥을 이용해서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 경향의 작가들은 화랑의 전시로부터 순수한 환경으로 방향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안드레Carl Andre(1935~ )는 내화벽돌로 마루를 깔고, 스미스Tony Smith(1912~1980)는 거대한 공간 구조의 조각으로 건축학적인 환경을 창조해서 전시했다. 이러한 환경미술은 결과적으로 삼차원적인 형태와 거대한 규모, 그리고 건축과 풍경에 대한 새로운 공감에의 관심을 부활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대지미술*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개념미술*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환두대도

환두대도 環頭大刀

손잡이의 머리부분이 고리모양인 칼로 원삼국시대의 고분에서도 출토되나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주로 나온다. 그 종류로는 고리 안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고리자루칼, 고리안에 세 잎의 잎사귀가 장식된 세잎고리자루칼, 용, 봉황이 표현된 용봉고리자루칼, C자형의 고리를 반원형으로 연결한 세겹고리자루칼 등이 있다. 세겹고리자루칼이나 용봉고리자루칼은 왕족에게만 부장이 허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