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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견문지

도화견문지 圖畵見聞誌

중국 북송北宋의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 11세기 후반경 활동)가 지은 화론서 6권.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의 《역대명화기歷代畵名記》를 이어 당唐 회창 원년(會昌, 814)에서부터 송宋 희녕 7년(熙寧, 1074)까지 생존했던 화가들의 전기와 화론, 회사(繪事)를 서술하였다. 당말(唐末)부터 북송 중기에 걸친 회화사의 기본적인 문헌이다. 제1권에는 화론, 제2, 3, 4권에는 당말에서 오대(五代), 송대(宋代)에 이르는 화가 280여명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평론을 실었다. 제5, 6권은 당, 송간에 일어난 회사의 고사일화로 채워졌다.
곽약허는 인종仁宗(재위 1022~1063), 신종神宗(재위 1067~1085)경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회화를 좋아하고 회화 이론에 밝았다. 곽약허의 예술사상은 《도화견문지》 1권에 실려 있는 16편의 단문에 집중되어 있다. 이 단문들에는 회화의 규칙과 감상, 대상관찰의 방법, 제재의 선택, 형상의 묘사, 표현 기교, 작가와 모사대상의 관계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글에는 곽약허의 미학사상이 도처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미학사상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은 배워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문인사대부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이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북송시대 문인화*론을 대변하는 것이다.

도화서

도화서 圖畵署

조선시대 궁정에서 회화를 담당했던 기관. 궁중 및 정부가 필요로 하는 회화를 제작하였는데, 어용(御容, 왕의 초상화), 풍경화*, 고화모사(古畵模寫), 삽화, 도자기 그림, 세화*(歲畵), 능원도(陵園圖) 등을 주로 그렸다. 중국의 화원인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전채서典彩署, 《고려사》에는 한림도화원, 화국畵局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화원圖畵院으로 부르다가 세조(재위 1455~1468) 말경 도화서로 개명하였다. 직원(職員)에는 제조(提調) 1, 별제(別提) 1, 선화(善畵) 1, 선회(善繪) 1, 화사(畵史) 1명을 포함한 화원*(畵員) 20명, 생도(生徒) 10명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실무주관자인 별제가 폐지되고, 화원이 20명에서 30명으로 늘고, 전자관(篆字官) 2명이 추가되는 등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한말(韓末) 순조 때까지 지속되었다.

독일미술가협회

독일미술가협회 獨逸美術家協會
Deutscher Künstlerbund(독)

1903년 독일의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독일미술가들의 협회. 국립이었던 이 협회는 개개인의 미술적인 신조에 관계없이 모든 독일 미술가들의 관심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창립회원으로는 폰 슈툭Franz von Stuck, 코린트Lovis Corinth(1858~1925),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 등이 있다. 이 협회는 전시나 국가적 비상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다른 도시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6년 나치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1950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돈황 敦煌

돈황 敦煌 Tun-huang(중)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 곤륜산맥崑崙山脈 북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사주沙州’ ‘과주瓜州’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재위 기원전 141~88)가 돈황국을 둔 이래,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가 되어 왔다. 서역과 중국의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불교가 일찍부터 전해졌고 불교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 중기 북위北魏의 황족인 동양왕東陽王 원태영元太榮이 과주자사瓜州刺史가 되었고, 북위가 멸망한 뒤에도 그 자손이 다스렸으며, 서역의 본토로부터 승려를 불러들여 석굴을 많이 개착하여 천불동이 이루어졌다.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기에는 중국의 지배가 회복되었는데, 781~850년은 티베트가 점거하였고, 851년에 장의조張議潮가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가 되어 하서 일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는 위구르, 티베트가 할거하였고, 900년경 절도사가 된 조씨曹氏는 돈황 오아시스만을 차지하는 소국을 건설하였으며, 위구르 왕이나 우진 국왕과 통혼 연합하여 중국과 교통하였다. 막고굴莫高窟의 대형 석굴이나 안서 유림굴, 그리고 장경동에서 발견된 고사본 중 많은 것이 이 시기의 것이다. 그 후 10세기 중반부터 탕구트족이 건국한 서하西河의 영토가 되고, 결국에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대(明代) 초기에 일시 회복되었는데, 15세기 초에 명明이 가욕관嘉峪關 서쪽지방을 포기하여 몽골족의 유목지가 되었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다시 한인이 들어와 현성縣城을 세웠다.

돈황석굴군

돈황석굴군 敦煌石窟群

돈황석굴은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불린다. 현성縣城 동남쪽 30km 떨어진 명사산鳴沙山의 기슭에 1,600m에 걸쳐 2단 또는 3단으로 파여 있고, 흙이나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약 480굴에 달한다. 착굴의 시작은 동진東晋의 영화 9년(353), 또는 전진前秦의 건원 2년(366)에 승려 낙준樂僔이 시작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275동은 그 양식으로 볼 때, 운강석굴*(雲岡石窟)이 시작된 북위北魏의 화평 연간(460~465)의 것이다. 북위,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오대(五代), 송宋, 서하西夏, 원元에 걸쳐서 석굴의 개착이나 수리가 계속되었다.
석굴은 승원굴(僧院窟)의 영향을 받아서 방형평면(方形平面)으로 좌우 벽면에 불감*(佛龕)을 만들어 불보살을 안치하는 형식이다. 석질이 거친 반암이므로 네벽과 천장을 칠식(석회와 찰흙을 불가사리로 반죽한 것)으로 칠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고 소조*로 된 불상*을 안치시켰다. 불상의 종류는 2,415존에 달하며, 한두가지 예외적인 석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상(塑像)으로서 색채가 선명하게 칠해져 있다. 벽화는 당시 성행하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경》 《유마경》 《보은경》 《화엄경》 등의 변상도*와 본생도*, 불전도* 등의 그림이 있다.
불상이나 벽면의 양식은 인도 서역풍, 중국의 재래 양식, 티베트 양식 등 다양하다. 낙양을 시작으로 하는 목조건축이 없어진 오늘날 돈황석굴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돈황 부근에는 천불동(막고굴) 외에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楡林窟, 안서 수협구水峽口(小千佛洞)가 있다. 서천불동은 막고굴 서쪽 40km지점에 있고 19굴로 되어 있으며, 북위, 당, 오대의 벽화, 소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유림굴은 막고굴 동쪽 100㎞, 안서의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만불협에 있고, 총 40굴 가운데 29개의 굴에 북위에서 당에 이르는 시대의 벽화가 있다. 또 수협구굴은 안서와 유림굴의 사이에 있고, 현존하는 것이 6굴 정도의 소규모의 석굴이다.
돈황 석굴은 금세기 초 각국의 학자가 방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에는 영국의 스타인Sir Mark Aurel Stein(1862~1943)이 탐험하여 약 15,000점의 한문, 티베트 문자로 된 경전, 고사본과 500여 점의 비단, 종이, 마포에 그려진 불화류를 가지고 돌아갔다. 현재 그것들은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인도 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aul Pelliot(1878~1945)에 의해 석굴의 사진이 소개되고, 약 5,000여점의 고사본, 약 150점의 회화, 공예품이 파리의 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었다. 1911년에는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14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크Sergei Fedororich Oldenburg(1863~1934) 일행이 각각 방문하였다. 오타니 탐험대의 발굴품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그리고 올덴부르크의 발굴품은 에르미타주미술관과 구소련국립동양연구소 성 페테르부르크 지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 미국의 워너Langdon Warner(1881~1956), 중국의 진만리陳萬里(츠언 완리), 향달向達(시앙 따) 등이 조사했다. 1944년 중화민국 정부는 돈황예술연구소를 창설하였으며 그 후 장대천長大千(즈앙 따지엔) 등의 조사와 벽화모사가 행해졌다.
1952년에는 새 중국정부에 의해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가 개설되어 보존과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이 연구소의 동굴 번호가 학계의 표준이 되고 있다. 돈황의 유적과 출토된 문물의 연구를 총칭하여 ‘돈황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돈황회화

돈황회화 敦煌繪畵

현존하는 돈황 회화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천불동千佛洞(莫高窟),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安西楡林窟 등의 석굴 사원군의 벽화*이다. 상하 5m폭의 화면으로 총연장은 무려 25km에 달하며 연대는 5세기 중기(북위北魏)부터 14세기 초(원元)에 이른다. 조굴명(造窟銘)이나 공양자명(供養者銘)에 의거하여 양식적인 편년이 가능하며,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즉 5~6세기의 벽화*는 중국 고대회화의 전통에 중앙아시아(특히 쿠차)의 영향이 가미된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불전(佛傳), 본생(本生) 등의 설화를 프리즘처럼 옆으로 길게 전개해 놓은 것이 많다. 7세기에 들어서 당唐이 서역을 지배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진보된 양식이 직접 도입되었고 유기적인 화면 구성, 세련된 도상에 의한 대규모의 정토국(淨土國) 표현이나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등의 변상*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8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하였다.
존상이나 공양자의 원숙한 묘사법, 깊이 있는 산수의 표현 등 중국 고대회화의 고전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가 점령한 시기(787~848)를 거쳐 장씨張氏, 조씨曹氏의 귀의군기(歸義軍期, 9세기 후반~11세기 초반)가 되어서는 도상이나 표현이 번잡한 채로 고정화되었으며, 지방적인 양식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비단, 삼베, 종이 등이 그려진 봉납용, 예배용 화폭이나 두루마리*류로서 11세기초에 막고굴의 소굴(藏經洞)에 감추어져 있다가 19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의 종류는 양식이나 화법이 세련된 것, 거친 것 등 다양한데,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700여점을 헤아리고 있어, 중국의 불교회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

돌멘

돌멘 dolmen(영)

→ 고인돌

돌방무덤

돌방무덤

석실분(石室墳)이라고도 한다. 판상석(板狀石) 등을 이용하여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든 무덤으로 널방을 마련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아올려 봉토를 만든다. 한반도의 석실분은 중국묘제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 국내성 지방에서 시작되어, 한강유역에서 일반화되고 그 뒤 백제와 가야지역으로 일반화되었다.

돔 dome(영)

건축용어로서 원형, 방형(方形) 또는 다각형(특히 8각형)의 방에 붙어있는 둥근 천장을 지칭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 다각형, 타원형이고, 옆에서 보면 반원형 내지 만곡(彎曲)의 달걀 모양이다. 완전히 막혀져 있는 것, 꼭대기에 창문을 만들어 터놓은 것, 꼭대기의 개구부 윗부분에 빛을 받기 위한 창문을 가진 작은 탑, 즉 랜턴(lantern)을 얹은 것 등 수 많은 종류가 있다. 돔은 평면에서 360도 회전하여 종석에서 만나는 일련의 아치*들로 간주될 수도 있고, 수평면에서 중첩되어 하나의 원형 돌로 축소되는 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형태는 구조상 중요하다. 첫번째 형태는 외부에서 미는 힘을 지탱하고 기초와 측면에서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며, 두번째 형태는 원래 중량품으로서 접합이 어려운 곳에 더 적합하다. 돔은 목재나 석재, 주형 콘크리트, 금속 따위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알루미늄 같은 가벼운 금속이나 더 강화된 콘크리트 등을 사용한다. 돔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돔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형식은 선사의 그리스 문화(→‘에게 미술’ 참조)인 이른바 원형 분묘이다. 이 형식은 언덕을 뚫어서 측면 벽을 잘라서 만든 돌로 쌓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식의 분묘로서, 완전한 돔식(式) 건축이라고는 할 수 없다. 헬레니즘 시대의 준비단계를 거쳐서 로마 시대의 건축이 되면 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매우 훌륭한 돔으로 발전되어 나타났다. 즉 원형 평면 위에 크고 작은 돔이 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은 로마의 판테온 신전이다. 비잔틴의 돔은 사각형의 평면 위에 소위 말하는 펜덴티브*(pendentive)를 사용하여 그 상부에 돔을 축조한 더욱 발전된 양식으로 나타났다.
이 설계는 원형이나 다각형 기면 위에 돔을 얹는 옛날 방식(판테온)보다도 한층 높고 밝으며, 훨씬 경제적인 돔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하기아 소피아>이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오리엔트의 그리스도교 건축, 나아가 회교 건축에까지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이 구조법이 별로 응용되지 않았는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재차 활용되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된 이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는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에 의해 건립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들 수 있다. 또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된 것 중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에 의해 건축된 유명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돔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돔 건축은 그 의의를 상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에 있어서도 종종 채용되고 있다.

동거파

동거파 董巨派

중국 오대(五代) 남당(南唐)의 화가 동원董源(똥 위앤), 거연巨然(쥐 르안) 및 이들의 화풍을 계승한 화가들의 총칭.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와 함께 이른바 남종화*(南宗) 양식의 종조(宗祖)로 평가된다. 송대(宋代)에는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이 ‘평담천진(平淡天眞)’하다고 해서 높이 평가한 외에는 추종자가 없었다.
그러나 원초(元初)에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가 복고의 기치 아래 동거파 양식을 부활시킨 이래 문인화가들의 양식으로 크게 확산되어 원사대가*(元四大家) 및 명대(明代)의 오파*吳派로 계승되었다. 명말(明末) 송강파*松江派에 의해서 왕유를 계승한 정통 남종화의 종조로 추앙되기에 이르러 원, 명대(元明代) 문인화*(文人畵)의 발달 및 명말 남종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거파 화풍은 험준한 산악보다는 강이나 호수 주변의 산수를 다루고 한겨울의 고목보다는 한여름의 잎이 무성한 수목들을 선호하며, 바위와 언덕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반두준(班頭皴)과 피마준*(披麻皴)을 사용하는 데 그 양식적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