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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匜

→ ‘이기’ 참조

이곽파

이곽파 李郭派

오대(五代), 북송北宋 초기의 이성李成(리 츠엉)이 완성시킨 북방계 산수화* 양식과, 거기에 또다른 형식을 가미시킨 곽희郭熙(구어 시)의 산수화 양식을 계승하는 화가들의 총칭. 이성과 곽희의 화풍은 대체로 뭉게구름처럼 보이는 침식된 황토산을 즐겨 그리되 그 표면처리에 있어서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도록 붓을 서로 잇대어 쓴 것이 특징이다. 특히 곽희 때부터는 산의 밑둥을 밝게 표현하여 조광 효과(照光效果)를 내었다. 산수는 대개 근경, 중경, 원경이 점차 상승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며, 고원 산수의 경우, 거비파*적인 모습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또한 나뭇가지들은 게발톱처럼 보이는 해조묘*로 그려지며, 소나무 잎은 송충이 털처럼 묘사된다. 보통 이 화파에 속하는 화가들로는 북송 말기 곽신郭信(구어 신), 양사현楊士賢(양 스시앤), 고량顧亮(꾸 량), 주예朱銳(주 위에), 호순신胡舜臣(후 슈엔츠언), 장저張著(즈앙 쭈) 등 10여 명이 있다. 남송南宋 화단에서 이들의 영향은 매우 커서, 영파불화寧派佛畵의 산수 표현에까지 미치고 있다. 원대(元代) 화단은 북송 양식의 회귀 경향 속에서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원대 후반에는 상기商琦(상 치) 이간李衎(리 칸, 1260경~1310), 조지백曹知白(차오 즈바이), 주덕윤朱德潤(주 떠르운), 가구사柯九思(커 지어우쓰), 당체唐捸(탕 띠), 염양閻驤(이앤 르앙) 등이 잇따랐다.

이기

이기 彛器 yi-gi(중)

중국 고대의 청동 제기(祭器)를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 흔히 종묘(宗廟)에 바쳐지는 그릇이란 의미로 쓰인다. 실제 명문*에도 ‘보존이’라고 되어 있으며 기형을 구별하지 않고 청동기를 부를 때 ‘이(彛)’라고 한다. 원래 선조의 영혼을 강림시키기 위한 그릇으로서 그 자체가 높이 받들어졌지만, 곧 제기라는 의미가 커졌으며 제사를 중시한 왕조에 있어서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형태는 은殷나라 때 이미 완성되었다.
오늘날 알려진 중국 고대 청동기의 종류는 수십 가지가 있는데, 주기(酒器), 식기(食器), 수기(水器) 등으로 나뉜다. 음식을 삶는 그릇으로는 발이 셋 달린 정(鼎), 력(鬲), 언(甗) 등이 있는데, 삼족기는 용산문화*의 토기*에서 기원한 형태로 해로운 것을 예방하며 불이 없이도 음식을 익힐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에는 불에 올려놓았다 내렸다 할 수 있도록 커다란 손잡이가 달려 있다. 정(鼎)은 제사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기물로 곧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언(甗)은 시루와 역을 합해 놓은 형태로 찜통과 같은 그릇이다.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는 손잡이가 두 개 붙은 궤(簋)와 대야 모양의 우(盂)가 있다.
주로 술을 담는 그릇으로는 뚜껑이 있는 항아리나 병 모양의 호(壺)가 있고 쇠사슬 형태의 흔들리는 손잡이와 때로는 주둥이가 있는 유(卣)가 있다. 아랫부분은 컵 모양의 둥근 형태에 윗부분은 나팔같이 밖으로 향한 치(觶), 약탕관 모양의 화(盉), 트럼펫 모양을 한 기다란 고(觚), 이를 확대한 형태의 준(尊)이 있다. 고와 준은 토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가(斝)도 술을 데우는 비교적 큰 그릇으로 입 가장자리에 두 개의 삿갓 모양의 작은 기둥이 솟아 있고 측면에 하나의 손잡이가 있으며 셋 또는 넷의 다리가 붙은 형태이다. 은殷, 서주西周시대에 성행한 이 그릇은 하대(夏代)에는 잔(醆), 은대(殷代)에는 가(斝), 주대(周代)에는 작(爵)으로 불렸다. 작(爵)은 주구가 넓고 오른쪽에 손잡이가 붙고 다리가 셋 달린 술잔이다. 그리고 배 모양으로 된 국그릇 같은 굉(觥)은 술을 혼합하는 데 쓰였고 평소에는 뚜껑이 있고 국자를 넣게 되어 있다. 이 밖에 물을 따르는데 쓰는 이(匜)와 손 씻을 물을 담는 반(盤), 감(鑑), 세(洗) 등은 아마 목욕재계시에 사용했던 그릇으로 추정된다.

이동파

이동파 移動派
Peredvizhniki(러)

19세기 말의 러시아 미술 운동. 1872년 크람스코이Nikolai Kramskoi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제실(帝室)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는데, 13명의 학생을 이끌고 아카데미*의 교육 내용에 반항, ‘러시아 이동전람회연합’을 창설하였다. 당대 일반의 급진적인 여러 단체가 민중을 정치적으로 교화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하여 모든 민중을 계도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이런 이유에서 엄격한 사실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미 자체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농노제의 유물과 자본주의의 악덕을 적발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주장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러시아 각 도시에서 전람회를 열게 되어 이 호칭이 생겼다.
레핀Ilya Repine(1844~1930),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스네초프Viktor Mikhailovich Vasnetsov, 페로프Vasily Perov, 이반 시스킨Ivan Iranovich Shishkin, 마코프스키Vladimir Makovsky, 레비탄Isaak Levitan, 폴레노프Vasilij Dmitrievich Polenov(1844~1927), 카사토킨, 세로프 등 19세기의 훌륭한 화가 대부분이 참가, 크람스코이를 사상적인 지도자로 하고 비평가 스타소프V.V. Stasov(1824~1906)도 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보적인 지식층으로부터의 지원과 함께 20년간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미지

이미지 image(영)

보통 영상, 심상 등으로 번역된다. 프랑스어로는 이마주. 어원인 이마고(imago)에서 유래한다. 본래의 의미는 ‘인물의 영상’ ‘초상’이나 보통 인간에 한하지 않고 회화적이거나 조소적인 수단에 의하여 재현된 사물과 대상의 모상 내지는 사물과 대상의 형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 빛의 반사, 굴절, 투영에 의하여 거울과 스크린 위에 투영된 대상계 즉 영상을 의미하기도 하며, 마음 속에 생각되는 직관적 형상, 즉 심상을 말하기도 한다. 이 심상의 경우는 관념의 표상에 가까우나 이는 보다 감각적인 성질이 강하다.
이미지는 외계의 자극에 의해 의식에 나타나는 대상의 직관적인 표상을 말하는데, 사르트르Paul Sartre에 따르면 화상(畵像)과는 구별된다. 사르트르는 이미지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작용이나 대상 지시작용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그 점에서 화상과 유사함을 인정하나, 이미지에서는 건물의 기둥 수를 헤아릴 수 없듯이, 그것은 물체가 아닌 의식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화상과 구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물체의 지각상(知覺像)이므로, 이미지와 물체는 종이의 표리와 같은 관계에 있다. 자연주의*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대미술에서는 마음 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현대 미술에서 이미지와 물체 즉 오브제*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구분된 것은 초현실주의*에 의해서였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가 콜라주*의 과정에서 내면에 숨겨진 환상과 같은 욕망으로서의 이미지의 형상화를 의식한 것은 그 한 예에 속한다.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 등 초현실주의의 자동적인 수법도 이미지 형상화의 한 수단이었다. 추상표현주의*는 그린다는 행위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탐구하였다.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 )는 또 그린다는 행위와 일상 오브제를 등가물(等價物)로서 화면 속에 끌어 들인 컴바인 페인팅*을 실천하였고, 존스Jasper Johns(1930~ ) 역시 성조기나 숫자 등을 화면에 그림으로써 사물 그 자체보다도 이미지로서의 현실을 다루었다. 그는 종래의 이미지와 오브제의 관계가 복잡하게 교차되면서 변질된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새롭게 전개시켰다.

이상주의

이상주의 理想主義 idealism(영)

창작에 있어서 인간이나 자연 등의 대상에서 개별성과 우연성을 배제하고 일정한 미*의 원리에 따라 그 본질을 이상적인 형식으로 실현하는 태도로, 자연주의* 또는 사실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자연적 형태 자체를 내적으로 초월하여 영원불변의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 미술*이나, 사실성에 입각하여 이상미를 추구한 르네상스 미술* 등이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상주의는 특정의 운동, 일정한 양식이 아닌, 제작자의 심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미술이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의 이상화를 조건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각종 종교미술, 고전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등 그 각각에도 이상주의적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상주의는 감정과 열정을 이성의 통제 하에 두기 때문에 지적인 숙고가 요구되며 이것이 사라지면 아카데믹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이야기 미술

이야기 미술 story art(영)

‘이야기 미술’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진 사건들을 형상화하는 미술을 말한다. 묘사의 대상인 사건들은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생길 어떤 일을 암시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시켜 표현될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회화*는 최소한 고대 이집트 이후부터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 왔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역사화는 가장 높이 평가되는 장르였다. 19세기의 회화와 조각*은 단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뿐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일상적인 드라마로 묘사하곤 했다. 이러한 주제들은 19세기 말, 당시의 생활 모습을 선호한 화가들에 의해 배격되었다. 그 이후 현대미술가들은 서술적 회화와 조각을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이야기의 서술은 시각적인 미술보다 문필가에게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문학적’이라는 용어를 현대미술에 적용하면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자 추상을 고집하고 서술적 미술을 터부시한 모더니즘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미술가들이 이야기 서술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팝 아트*, 뉴리얼리즘*의 회화와 조각, 그리고 누보 레알리슴*은 미술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술적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구상 이미지를 산출했다. 이야기 서술의 시각적인 표현에서 가장 인기있는 형태는 회화이고 그 다음은 퍼포먼스* 아트와 설치*미술 및 비디오 아트*이다. 서술적인 접근방식은 20세기 말 사회적 상호 접촉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소인 심리학적 자아 성찰을 주제로 한 미술에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이티

이에이티 E.A.T.(영)

‘예술과 과학 기술에 의한 실험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약자. 1966년 1월, 스톡홀름의 예술과 과학 기술의 제전(祭典)에 참가한다는 취지로 탄생하였다. 그 결과, 9월의 제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10월에 <극장 및 엔지니어링의 아홉 밤 9 Evenings: theatre and engineering>이라는 타이틀로 뉴욕에서 대대적인 발표회를 가졌다. 장소는 1913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전위미술 전시회가 열렸던 아모리 쇼*의 건물이었다. 이때 기술자의 대표로서 벨 연구소의 과학자 빌리 클뤼버가 중심이 되어, 각 분야에 걸쳐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기술적인 면에서 구체화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때의 예술가로는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1925~ ), 케이지John Cage를 비롯하여, 해프닝*이나 연극 관계의 작가도 있다. 결과는 예술가들이 새로 개발된 제어장치를 마구 사용하여 실패한 프로그램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미국의 전후 미술에 새로운 장(場)을 남긴 시도였다.
그 후 ‘이에이티’의 활동은 최초의 화려한 쇼에서 보다 착실하게 과학과 예술 사이의 여러 문제를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이티는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일찍이 성공을 거두는데, 거기서 여러 미술가들은 1967년과 1971년 사이에 산업 연구를 하며 오사카의 엑스포70에서 펩시콜라 분관 설치를 구상하지만, 비용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다. 1968년 2~5월 초에 걸쳐 컴퓨터, 레이저, 텔레비전 등의 새로운 기술, 그 밖의 새로운 소재 등에 대한 연속 강좌를 열거나 1968년 가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계 예술전’을 기념하여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에서 작품에 대한 세미나가 기획되기도 하였다.

이오니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Ionic Style(영)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주식*(柱式)으로, 도리아 양식*보다 후에 발달한 양식이다. 아테네 전성 시대 이래 한 세기 동안 지배하였는데, 그 발달은 오히려 소아시아 및 그 주변 지방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둥은 주초(柱礎, base), 주신(柱身, shaft), 주두*(柱頭, capital)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초는 상면석*(stylobate) 위에 있다. 주신은 도리아 양식보다는 한층 더 섬세하며, 세로홈(fluting)은 초기의 것은 수가 적으나 점차 증가하여 24개까지 된다. 이오니아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주두에 있는 소용돌이(volute) 모양 장식이며, 두 개의 소용돌이가 좌우에 있다. 엔타블러처* 부분에도 도리아 양식보다 더욱 장식이 많다. 아키트레이브*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윗부분일수록 외부로 돌출되어 있다. 프리즈*는 부분들의 구분이 있던 도리아 양식과 달리 띠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 ‘주식’ 도판 참조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이왕직 미술품제작소 李王職美術品製作所

1908년에 서울 광화문 근처에 설립되었던 왕실기물 제작소. 전통수공업체제의 붕괴와 기계제 생산으로 인한 공예품의 질적 저하 현상 속에서 ‘조선의 전통적 공예미술의 진작’을 취지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명칭이 한성미술품제작소였으나 1910년 12월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되었다. 이후 1922년 일본인에 의해 민간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전환되면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1936년 7월에 폐쇄됐다. 한성미술품제작소 시기에는 도안실, 제작실, 사무실의 3실과 제작실 안에 금공, 목공, 염직의 3부를 두었고 어느 정도 운영상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이전까지의 왕실공예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절에는 일본인이 운영에 개입하고 제작시설을 나전칠기*, 목공, 제묵, 주금, 단금, 보석, 조각, 입사*, 도자, 두석, 염직의 11개 부문으로 조직규모를 확대했지만, 일본인의 취향을 의식한 중국 고동기 모양의 기형을 대량으로 제작하는 등 그 성격이 달라졌다. 1922년부터는 제작품 양식이 일본화되어 일본의 전통문양인 오동잎 문양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기념품, 트로피 등 상품제작에 주력했다. 1933년 신설된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함께 일본인의 이국취향에맞추는 대로 공예 발달을 왜곡하는 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