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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상

흉상 胸像 bust(영)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을 다룬 조상(彫像). 흉상의 역사는 초상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후 세계를 믿었던 이집트 인들은 여러 선명한 색을 사용해 죽은 사람의 흉상을 만들었지만 예술 작품을 유기체로 본 고대 그리스 인에게는 인체를 절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흉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흉상이 다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흉상은 눈먼 ‘호머’의 초상에서와 같이 이상화된 형태와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미술에서와 같이 사실적인 형태가 공존한다. 로마 시대에 흉상은 최전성기를 맞아 공화정 초기부터 정교하고 다양한 창의적인 흉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초상 미술을 금기시한 중세에는 흉상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유골함에 값비싼 금속으로 성자들의 모습을 조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르네상스*, 특히 15세기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매우 사실적인 것에서부터 형식에 치우친 이상화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의 흉상을 부활시켰다. 16세기에는 로마 제정 후기의 정교한 흉상을 모방했으며, 바로크* 시대에는 새롭고 화려한 형태로 발전했다. 그 후로는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나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흉상같이 단순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 로댕Auguste Rodin(1840~1917), 데스피오Charles Despiau(1874~1946)와 엡스타인Jacob Epstein(1880~1959) 같은 미술가들이 흉상을 제작했으나, 인물의 성격 묘사에 치중해 전통적 형태에서 멀어졌다. 현대에는 학구적인 조각가들에 의해 흉상은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흉중구학

흉중구학 胸中丘壑

‘마음 속에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心象)이 있다’는 동양회화 용어. 여기서 구학, 즉 언덕과 골짜기는 속세를 떠난 이상향이라는 의미이다. 산수를 심상으로 구상하고 파악함으로써 참다운 산수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곽희郭熙(구어 시)는 《임천고치*》에서 “임천(林泉)을 동경하는 마음이나 연하(烟霞)와 벗삼으려는 생각은 꿈 속에서나 있을 뿐이요, 생생한 현실에서는 단절되어 있다. 이제 묘수를 얻어서 생생하게 이를 표현하면 집과 뜰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임천과 골짜기를 오르내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림 속의 산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의 본의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드시 자연을 접하면서 의(意)를 널리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즉 마음껏 즐기고 본 산수는 모두 ‘흉중에 역력히 늘어서게 될’ 뿐만 아니라, ‘산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과 마음속에 저절로 떠올라서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 경지’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산수화라는 것이다. 곽희가 살았던 송대(宋代)에는 자연의 형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는 자기의 예술관에 입각해 자연을 미화시키는 이상화를 중요시했다.
산수화 제작시 사의성(寫意性)의 기초인 ‘흉중구학’을 통해 산수의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였다. 실제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경험하고 터득한 산수자연을 소재로 한 후 그림의 의취를 살려 표현해야 한다는 이론은 산수화를 사의*적 개념과 형사*적 개념으로 조화시켜 이상화시키는 데 공헌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곽희를 필두로 하여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의 산수화론 등에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