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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

도요 陶窯

→ 가마

도원도

도원도 桃源圖

고사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중국의 동진東晋 태원 연간(376~396)에 무릉군(현 호남성 원남현 부근)에서 한 어부가 복숭아 꽃이 핀 선경(仙境)에 들어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았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진대(秦代)에 전쟁을 피하여 은둔했던 사람들의 자손으로 한漢, 위진魏晋의 변천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옷을 입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신선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동진의 도연명陶淵明(타오 위앤밍)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짓고부터 유명해졌으며, 별세계 혹은 선경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도화원기》를 보면 도원은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다만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있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던 문인(文人)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도원’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도원도도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걸쳐 많이 그려졌다.
당대(唐代)의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리우 쏭니앤), 원대(元代)의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 이후)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명대(明代)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 문가文嘉(원 지아) , 청대(淸代)의 석도石濤(스 타오, 1641~1717) 등이 많이 그렸다.
‘도원’이 한국에 언제 처음으로 알려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시대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매우 유명하다. 이후 화원화가인 이징李澄(1581~1645), 이하곤李夏坤(1677~1724), 강세황姜世晃(1713~1791), 이인문李寅文(1745~1821), 허련許鍊(1809~1892), 근대의 안중식安中植(1861~1919) 등이 도원도를 그렸다. 복사꽃이 어지럽게 핀 푸른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어부와 밭, 연못, 뽕나무, 대나무 등이 묘사된다.

도장

도장 圖章

→ 인장

도철문

도철문 饕餮文 tao-tie-wen(중)

중국 고대 문양으로 은殷에서 서주西周 중기에 종교의식에 사용한 청동기에 가장 빈번하게 보이는 수면문(獸面文)의 일종이다. 정면향의 짐승 얼굴을 중심으로 몸체가 양쪽에 대칭적으로 배치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부릅뜬 눈과 눈썹, 위로 말린 큰 뿔, 송곳니 등이 뇌문(雷文)을 바탕으로 양식화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청동기에서 표현된 도철문은 초기에는 얕은 양각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은대(殷代) 중, 후기가 되면 뇌문의 바탕 위로 모티브가 돌출한 부조풍으로 묘사된다.
‘도철(饕餮)’이란 단어는 《좌전左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이경神異經》 《산해경山海經》 등에 탐욕스럽고 흉악한 부락 또는 동물을 지칭한 것인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선식람先識覽>에 따르면 정*(鼎)에 새겨진 도철은 자신의 몸까지 먹어버린 모습을 통해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도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는데 토템신앙의 대상이었다거나 신과 교통하기 위한 신수(神獸), 호신용 부적 또는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쿄화단

도쿄화단 東京畵壇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기에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의 근대화단. 미국인으로서 일본 전통미술의 우수성을 깨우쳐준 페놀로사Earnest Francisco Flenollosa(1853~1908)에 힘입어 등장한 도쿄화단은 페놀로사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지식인이자 관료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의 사상이 주축이 되었다. 오카쿠라 덴신이 1890년(메이지 23)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곳이 초기 도쿄화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카쿠라의 사상을 이해하고 화폭에 옮겼던 화가로는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히시다 쇼菱田春章,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등이 있다. 오카쿠라 덴신은 전통적인 색채를 소중히 여기는 한편 서양회화에서 중시하던 빛, 대기감 등을 일본의 전통회화와 접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몽롱체(朦朧體)가 등장하여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線)이 일시적으로 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동양회화의 특징인 선(線)을 살리는 방향으로 회귀하였고 여기에 서구적인 사실성을 더하여 일본 근대기의 명작을 낳게 되었다.
도쿄화단의 중심이었던 도쿄미술학교는 교장이었던 오카쿠라 덴신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나 그의 수제자들과 함께 1898년(메이지 31년) 일본미술원*日本美術院을 설립하게 되면서 그 중심적인 역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미술원은 화단의 재야단체로서 혁신적인 실험을 통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일본미술원의 멤버로 기존 인물들 이외에 이마무라 시코今村紫紅, 고바야시 고케이小林古徑, 하야미 교슈速水御舟 등이 있다. 서양화에서 후기인상주의*나 초현실주의* 개념을 빌려 동양화에 적용하여 파격적인 작품을 시도하면서 신선하고 세련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일본회화의 전통인 야마토에*를 근대적 취향으로 변형시키는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일본미술원도 분열의 조짐을 보이면서 약화된다. 그러나 오카쿠라 덴신이 사망한 후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요코야마 다이칸을 중심으로 재흥일본미술원*在興日本美術院이 다시 설립돼 분산된 힘을 응집할 수 있었다. 비록 문전(文展)에서 보이는 아카데미적 경향과는 다른 재야단체이기는 하지만 일본미술원 및 재흥일본미술원이야말로 일본화단을 선도한 가장 큰 힘이라고 하겠다.

도큐멘타전

도큐멘타전 Dokumenta(독)

1955년 이래 독일 카셀에서 4~5년마다 여름철에 열리는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회. 보데Arnold Bode의 최초의 발상 이후 ‘서구미술협회Gesellschaft für Abendlandfishe kunst’가 매년 전시회를 주관한다. 제2차세계대전 후, 독일은 동서로 분할되었지만, 카셀은 분단되기 전 독일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큐멘타전을 카셀에서 개최하는 것은 독일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고,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 또한 현대미술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도큐멘타전은 히틀러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된 전위예술*이 다시금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여, 독일의 과거 이미지를 불식하고 문화국가로서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전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초기의 전시는 카셀아카데미의 교수 보데와 독일의 주목할 만한 예술이론가 하프트만Werner Haftmann에 의해 주관되었고, 독일을 세계에 선보이려는 입장이 강조된 경향의 것이었다. 1972년부터 획기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지만Harold Szeemann이 전시의 책임을 맡고 그 주제를 ‘개별 신화’ 등으로 한 이후 점차 테마전(展)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도큐멘타 출품작가의 선정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초대작가도 유럽인이 압도적이지만 적어도 다음 개최일까지의 세계현대미술의 향방을 시사하고 가늠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권위와 전문성을 지닌 전시회로서 인정받고 있다.

도화견문지

도화견문지 圖畵見聞誌

중국 북송北宋의 곽약허郭若虛(구어 루어쉬, 11세기 후반경 활동)가 지은 화론서 6권.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의 《역대명화기歷代畵名記》를 이어 당唐 회창 원년(會昌, 814)에서부터 송宋 희녕 7년(熙寧, 1074)까지 생존했던 화가들의 전기와 화론, 회사(繪事)를 서술하였다. 당말(唐末)부터 북송 중기에 걸친 회화사의 기본적인 문헌이다. 제1권에는 화론, 제2, 3, 4권에는 당말에서 오대(五代), 송대(宋代)에 이르는 화가 280여명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평론을 실었다. 제5, 6권은 당, 송간에 일어난 회사의 고사일화로 채워졌다.
곽약허는 인종仁宗(재위 1022~1063), 신종神宗(재위 1067~1085)경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회화를 좋아하고 회화 이론에 밝았다. 곽약허의 예술사상은 《도화견문지》 1권에 실려 있는 16편의 단문에 집중되어 있다. 이 단문들에는 회화의 규칙과 감상, 대상관찰의 방법, 제재의 선택, 형상의 묘사, 표현 기교, 작가와 모사대상의 관계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글에는 곽약허의 미학사상이 도처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미학사상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은 배워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문인사대부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이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북송시대 문인화*론을 대변하는 것이다.

도화서

도화서 圖畵署

조선시대 궁정에서 회화를 담당했던 기관. 궁중 및 정부가 필요로 하는 회화를 제작하였는데, 어용(御容, 왕의 초상화), 풍경화*, 고화모사(古畵模寫), 삽화, 도자기 그림, 세화*(歲畵), 능원도(陵園圖) 등을 주로 그렸다. 중국의 화원인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전채서典彩署, 《고려사》에는 한림도화원, 화국畵局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도화원圖畵院으로 부르다가 세조(재위 1455~1468) 말경 도화서로 개명하였다. 직원(職員)에는 제조(提調) 1, 별제(別提) 1, 선화(善畵) 1, 선회(善繪) 1, 화사(畵史) 1명을 포함한 화원*(畵員) 20명, 생도(生徒) 10명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실무주관자인 별제가 폐지되고, 화원이 20명에서 30명으로 늘고, 전자관(篆字官) 2명이 추가되는 등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한말(韓末) 순조 때까지 지속되었다.

독일미술가협회

독일미술가협회 獨逸美術家協會
Deutscher Künstlerbund(독)

1903년 독일의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독일미술가들의 협회. 국립이었던 이 협회는 개개인의 미술적인 신조에 관계없이 모든 독일 미술가들의 관심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창립회원으로는 폰 슈툭Franz von Stuck, 코린트Lovis Corinth(1858~1925),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 등이 있다. 이 협회는 전시나 국가적 비상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다른 도시에서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6년 나치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1950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돈황 敦煌

돈황 敦煌 Tun-huang(중)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 곤륜산맥崑崙山脈 북쪽 기슭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사주沙州’ ‘과주瓜州’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재위 기원전 141~88)가 돈황국을 둔 이래,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경유지가 되어 왔다. 서역과 중국의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불교가 일찍부터 전해졌고 불교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 중기 북위北魏의 황족인 동양왕東陽王 원태영元太榮이 과주자사瓜州刺史가 되었고, 북위가 멸망한 뒤에도 그 자손이 다스렸으며, 서역의 본토로부터 승려를 불러들여 석굴을 많이 개착하여 천불동이 이루어졌다.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기에는 중국의 지배가 회복되었는데, 781~850년은 티베트가 점거하였고, 851년에 장의조張議潮가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가 되어 하서 일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는 위구르, 티베트가 할거하였고, 900년경 절도사가 된 조씨曹氏는 돈황 오아시스만을 차지하는 소국을 건설하였으며, 위구르 왕이나 우진 국왕과 통혼 연합하여 중국과 교통하였다. 막고굴莫高窟의 대형 석굴이나 안서 유림굴, 그리고 장경동에서 발견된 고사본 중 많은 것이 이 시기의 것이다. 그 후 10세기 중반부터 탕구트족이 건국한 서하西河의 영토가 되고, 결국에는 몽골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대(明代) 초기에 일시 회복되었는데, 15세기 초에 명明이 가욕관嘉峪關 서쪽지방을 포기하여 몽골족의 유목지가 되었고, 청대(淸代)에 이르러 다시 한인이 들어와 현성縣城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