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미술 元代美術
몽골인의 왕조를 원元이라고 칭한 것은 세조(쿠빌라이) 연간인 지원 8년(至元, 1271)이지만, 태조(칭기즈칸)의 즉위가 1206년이고 1215년에는 수도 북경北京을 함락시켰으며 1234년에 금金을 멸하였기 때문에 원대(元代)의 상한은 적어도 1230년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1348년에 마지막 칸의 가혹한 학정에 대한 중국인의 불만은 광범위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20년동안 반란군과 군벌 사이에 피폐해진 국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거듭되었고, 몽골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368년 칸이 북경을 통해 북쪽으로 도주하자 짧고도 불명예스러운 몽골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원왕조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명했고 불명예스러웠으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불확실한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고찰하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양식을 부활하려는 그들의 복고적인 태도는 장식미술 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여러 고전 양식 중에서 이민족인 요遼와 금金의 지배 아래서 반쯤은 화석화되어 보존되어 오던 당唐 양식을 선호하였다. 원왕조는 이 밖에 몇 가지 점에서 혁신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전통들을 부활시켰으며, 몽골의 지배에 의해서 자신은 독립적인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문인들 사이에 침투되어 조정에 소속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들 사이를 갈라놓은 구분이 생긴 것이다. 그 구분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회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왕조는 미술과 공예에서 많은 혁신을 이루었는데, 장식미술에서는 송宋의 우아미에 대한 반동으로 대담하면서도 찬란한 미술 경향을 보였다. 변화의 몇몇은 몽골 정복자들과 몽골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 땅에 봉건영주와 지주로 세워진 위구르인, 탕구트인, 돌궐인과 같은 비중국인 즉 색목인(色目人)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몽골인들은 정복당한 모든 종족의 미술가와 장인들에게 자신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였으며, 이들을 군사조직과 비슷하게 편성하였다. 미술가와 장인 중에는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심지어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미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중국 미술이었다.
건축:쿠빌라이가 세운 칸바릭Khanbalik의 원래의 건물지는 왼편 부분이 매우 조금 남아 있다. 현재의 북경은 본래 1421년 명明의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세운 것이며, 이후 명과 청淸에 의해 계속 건설된 것이다. 북경은 시 안에 시가 있고 다시 그 안에 시가 있게끔 구성된 구조이다. 즉 15마일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의 내부에 주위가 60.5마일인 황제시皇帝市가 있고 그 중심부에는 황제궁인 자금시紫金市가 있는 구조이다. 몽골 민족 고유의 가옥은 몽골어로 ‘게루’라 하고 궁려(穹廬)라고 쓰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버드나무 판으로 엮은 다각형의 골조를 억새로 덮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큰 가옥을 지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계 건축을 많이 수용하였다.
원대의 중국계 건축은 금과 남송 두 지역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대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지방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 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은 산서성山西省 남부의 영제현永濟縣 영락진永樂鎭의 도교 사원인 〈영락궁永樂宮〉이다. 북경 성안의 〈호국사護國寺〉는 거의 폐허에 가깝지만 비문과 현재의 상태를 통해서 당시 거대한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불탑*의 전대와 같이 남쪽에는 층이 있는 층탑, 북쪽에는 꼭대기가 뾰족한 첨탑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팔각 전탑(塼塔)보다도 육각 전탑이 더 많아지고, 그 규모는 작아진다.
조금 다른 형태의 예는 하북성河北省 순덕順德의 천녕사天寧寺 밖에 서 있는 〈허조선사명공탑虛照禪師明公塔〉으로 세 개의 육각첨(六角檐) 위에 복발*(覆鉢) 모양을 얹어서 상륜*(霜輪)을 세운 것인데, 다첨형 전탑과 라마탑의 복합형인 셈이다. 원대에 처음 나타나는 티베트계 라마탑은 북경의 묘응사妙應寺(일명 백탑사白塔寺, 1381)에 있는 백탑이다. 라마탑은 북경 호국사와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승상보탑勝像寶塔〉 등이 있다. 거기에 설치된 문 건축을 받침으로 하고 그 위에 라마탑을 얹은 것을 과가탑(過街塔)이라 부르는데, 북경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 안에 있는 백석(白石)으로 된 문건축이다.
회화:원대는 오대(五代)와 함께 중국 회화사상의 전환기로 복고적인 태도를 지니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다. 화원이 성했던 송대(宋代)와는 달리 원대에는 화원을 두지 않고 정부 기관인 공작서(工作署)에 화공을 배속하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화가로는 손군택孫君澤(순 쥔쩌) 등이 있다. 그 밖의 원체화가로는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 이후) 등이 있다. 전선은 온건한 방법을 취하면서도 혁신적인 면이 주목된다. 그의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는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가 거위를 바라보는 매력적인 두루마리* 그림인데, 고졸한 당양식으로 그린 그의 선택과 주제 그 자체는, 약점을 보이는 송문화에 대한 반동과 이후 문인 화가들의 중요 영역이 된 과거 미술에 대한 창조적인 재해석의 시작으로 조명된다.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은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를 지내며 원의 왕실에 봉직했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이다. 조맹부는 송의 정통 양식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동거파*董巨派의 강남 양식의 시문학과 필법을 재발견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할은 원사대가*를 비롯한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문인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문인 산수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또한 담담한 학자적 기지로서 당대(唐代) 산수화*의 예스러우면서도 고졸한 산수화 양식과 동원의 광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화시킨 점이 주목된다. 조맹부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반세기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예찬倪讚(니 짠, 1301~1374), 오진吳鎭(우 즈언), 왕몽王蒙(우앙 멍)의 원사대가(元四大家)에 의해 그 완성을 보았다.
황공망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3년의 세월 끝에 1350년에 완성된 것으로, 여유롭고도 꾸밈없는 기법으로 다루어져서 고전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포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고결한 단순성은 예찬에 의해 한층 더 발현되는데, 먹을 금같이 아꼈던 그의 그림에 흐르는 정적은 텅빈 듯한 화면 속에 얼마나 많은 풍부한 내용들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왕몽은 고뇌에 뒤틀린 듯한 선과 다양한 준을 사용하여 화면을 빽빽이 연결된 직물 표면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외에 원대에는 묵죽*이 특히 애호되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우아한 줄기와 칼끝과 같이 날카로운 잎은 붓으로 그리기에 좋은 주제였던 대나무 그림은 가장 어려운 예술인 서예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육조(六朝)시대부터 그려진 묵죽화는 원대에 이르러 특히 예찬과 조맹부와 같은 위대한 문인 화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한 문동의 화법을 배웠으며 아마추어 식물학자이자 화가로서 일생동안 묵죽의 연구에 매진하였던 이간李衎(리칸, 약 1260~1310)도 주목된다. 그의 저작인 《죽보상록竹譜詳錄》은 대나무에 관한 저술을 한 후대의 작가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간이 이룩해 놓은 것보다 더욱 자연스럽고 유려한 묵죽화가로는 오진이 있다. 그는 묵죽에서 주목되는 것은 간결한 필획으로 그림과 서예의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 점이라고 설파했다.
도자기:원대는 도자기에 있어서 혁신과 기술적 실험의 시대로서 유약 아래에 붉은 색이나 청색의 안료를 칠하는 새로운 기법이 생겨났고, 유약 밑에 부조*로 표현하는 옛 기법이 다시 부활되었다. 자주요*(磁州窯)와 균주요*(鈞州窯)를 제외한 나머지 북방요들은 요와 금, 그리고 몽골의 침입아래 거의 소멸되었고, 이에 따라 도자산업의 중심지는 중부와 남부로 옮겨졌다. 절강성浙江省의 용천*龍泉과 여수麗水에 위치한 가마들에서는 대규모로 자기가 생산되었다. 그리고 몽골이 이룬 대제국의 영항권아래 근동으로의 도자기 수출이 증가되었다. 원대에 속하는 도자기 형태들로는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접시들, 배 모양의 병들, 근동의 기형인 물병과 플라스크, 사발, 굽이 달린 컵 등이 있다. 장식 문양으로는 근동의 첨정 홍예문, 중국의 용, 연화, 소용돌이 모양의 국화, 잎으로 연결된 좁은 띠가 있으며, 이 중의 몇몇 문양은 이미 남송의 제주요(齊州窯)에서 나타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