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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

도상 圖像 icon(영)

고대 그리스어 ‘에이콘(eikón)’에서 유래된 용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벽화*와 구별되는 판화*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미술사에서 말하는 도상은 신성한 사건, 특히 성자들의 성상을 뜻하는데, 특히 비잔틴 교회나 러시아 및 그리스의 정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도상의 사용은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었지만,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유행한 황제의 초상에 대한 숭배 풍습에서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한편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상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의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이설(異說)을 설교하여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미쳤다. 8세기에 들어 이러한 경향은 절정에 이르렀고, 곧 성상파괴주의*자들에 의한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콘스탄틴 5세는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도상의 파괴를 명령했으며 패널*화, 프레스코*, 모자이크*는 물론 성인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 있는 책자들까지 파괴되었다.
그후 843년 제2차 종교회의 등으로 도상의 사용이 예배 의식을 위해 부분적으로 허용되면서 도상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종교 회의에서 진실된 예배는 오직 신적인 속성에 속하지만, 신의 표상에 의해 경배심이 촉진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도상은 일련의 규칙과 양식상의 엄격한 기준에 의해 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중세의 도상들이 유형화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동방교회에서는 도상 허용론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도상이 다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들 도상들은 단순한 인물상에서 점차 정경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 있는 모자이크화인 <수태고지*>라든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있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패널화 등이 그러한 예이다. 도상화나 도상을 사용하는 예배의식은 러시아로 전파되었고 비잔티움을 능가할 정도로 유행되어 러시아 혁명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한편 도상은 예술작품의 ‘주제’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른바 도상학* 혹은 도상 해석학* 등의 용어가 바로 그 예이다.

도상학

도상학 圖像學 iconography(영)

그리스어 ‘eikón’과 ‘graphein’의 합성어로서 ‘형태묘사’라는 의미. 상징성, 우의성, 속성 등 어떤 의미를 가지는 도상*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미술사*의 한 분야.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술품의 목록 제작을,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초상화*를 감정하는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반적으로 조형미술의 주제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도상학의 과제는 회화*와 조각*의 내용*과 테마의 규정, 순환 또는 상징*에 관한 프로그램의 규정, 그러한 테마와 프로그램의 묘사 유형의 생성, 확장, 변화의 연구이다. 도상학은 해석이 아니라, 명칭이나 개념 또는 텍스트를 인물, 알레고리*, 설명적인 묘사나 순환에로의 배열을 통해 분류화하는 것이다.
도상학은 보통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뉘어진다. 기독교적 도상학에 대한 작업은 1850년이래 종교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부응하여 프랑스에서 디드롱Adolphe-Napoléon Didron에 의해 최초로 생성되었다. 도상학의 종교적인 연구 결과는 《기독교 미술의 인덱스Index of Christian Art》와 백과사전에서 종합되었다. 세속적인 미술의 상징주의*에 대한 연구에는 바르부르크Aby Warburg(1866~1929)와 더불어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가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도상학이 조형미술을 감정하는 데 필요한 단순한 보조물 이상의 체계적인 연구가 되었다. 예를 들어 점성학 필사본* 속에 흔히 그려져 있는 유성들의 상의 변천, 풍속화의 발생 원인, 정물화*의 기원, 정치적 풍자의 도입 등 제반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결국 도상학은 개개 작품에 있어서 이념과 형상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다양한 요소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도상해석학

도상해석학 圖像解釋學 iconology(영)

도상학*에서 발전하여 도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내용과 형식간의 관계 체계를 연구함으로써 종합적인 미술작품의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사* 연구 방법의 하나. 바르부르크Aby Warburg(1866~1929)에 의하면, 도상해석학은 문화에서 조형적 묘사의 기능과 사용에 대한 연구이다.
‘도상해석학’이라는 용어는 1593년에 출간된 리파Cesare Ripa의 《이코놀로지아Ikonologia》에 기인한다. 이 책은 우정이라든가 비탄, 사랑 등의 수많은 개념을 의인화하여 도해한 일종의 도상 어휘사전이다. 훗날 이 용어는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에 의해 다시 채택되었는데, 그는 시각예술에 있어서 단순히 주제를 확인하는 학문인 도상학에 대응하여 시각예술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는 보다 폭넓은 접근방식을 뜻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대응을 통해 도상해석학은 주로 회화적 모티브*의 전통과 그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파노프스키는 미술 작품을 어떤 특정한 문명이나 시기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구체적인 기록으로의 취급 필요성과, 그리하여 미술사와 다른 영역의 역사적인 연구 작업과의 간격을 메워줄 필요성을 강조했다. 뛰어난 도상해석학 분야의 연구 업적으로는 파노프스키의 저서 《르네상스와 서양 미술에서의 르네상스》(1960)와 비트코우어Rudolf Wittkower의 《인본주의 시대에 있어서의 건축의 제원리》(1952) 등을 들 수 있다.

도석화

도석화 道釋畵

도교나 불교의 인물을 그리는 그림의 총칭. 당대(唐代)까지는 산수화*보다 우선하는 주제였으며,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당말 오대(唐末五代)에는 전통적인 묘선과 자연주의를 벗어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수묵의 도석화가 그려지게 되었고, 감상화로서 커다란 변화와 풍부함을 갖게 되었다. 옷무늬의 형식에서도 ‘조의출수(曹衣出水)’ ‘오대당풍(吳帶當風)’의 전형이 생겨날 정도로 이 시대의 도석화의 양식은 후세까지 모범적인 양식으로 추앙을 받았다. 또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 등에 의해서 당대의 백화(白畵)가 재현되었다. 그 후에 착색, 수묵, 백묘*(白描)의 화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특히 수묵 도석화는 선승(禪僧)의 여기(餘技)로 취급되어 작품화되었다.

도요

도요 陶窯

→ 가마

도원도

도원도 桃源圖

고사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중국의 동진東晋 태원 연간(376~396)에 무릉군(현 호남성 원남현 부근)에서 한 어부가 복숭아 꽃이 핀 선경(仙境)에 들어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았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진대(秦代)에 전쟁을 피하여 은둔했던 사람들의 자손으로 한漢, 위진魏晋의 변천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옷을 입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신선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동진의 도연명陶淵明(타오 위앤밍)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짓고부터 유명해졌으며, 별세계 혹은 선경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도화원기》를 보면 도원은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다만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있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던 문인(文人)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도원’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도원도도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걸쳐 많이 그려졌다.
당대(唐代)의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리우 쏭니앤), 원대(元代)의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 이후)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명대(明代)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 문가文嘉(원 지아) , 청대(淸代)의 석도石濤(스 타오, 1641~1717) 등이 많이 그렸다.
‘도원’이 한국에 언제 처음으로 알려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시대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매우 유명하다. 이후 화원화가인 이징李澄(1581~1645), 이하곤李夏坤(1677~1724), 강세황姜世晃(1713~1791), 이인문李寅文(1745~1821), 허련許鍊(1809~1892), 근대의 안중식安中植(1861~1919) 등이 도원도를 그렸다. 복사꽃이 어지럽게 핀 푸른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어부와 밭, 연못, 뽕나무, 대나무 등이 묘사된다.

도장

도장 圖章

→ 인장

도철문

도철문 饕餮文 tao-tie-wen(중)

중국 고대 문양으로 은殷에서 서주西周 중기에 종교의식에 사용한 청동기에 가장 빈번하게 보이는 수면문(獸面文)의 일종이다. 정면향의 짐승 얼굴을 중심으로 몸체가 양쪽에 대칭적으로 배치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부릅뜬 눈과 눈썹, 위로 말린 큰 뿔, 송곳니 등이 뇌문(雷文)을 바탕으로 양식화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청동기에서 표현된 도철문은 초기에는 얕은 양각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은대(殷代) 중, 후기가 되면 뇌문의 바탕 위로 모티브가 돌출한 부조풍으로 묘사된다.
‘도철(饕餮)’이란 단어는 《좌전左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이경神異經》 《산해경山海經》 등에 탐욕스럽고 흉악한 부락 또는 동물을 지칭한 것인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선식람先識覽>에 따르면 정*(鼎)에 새겨진 도철은 자신의 몸까지 먹어버린 모습을 통해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도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는데 토템신앙의 대상이었다거나 신과 교통하기 위한 신수(神獸), 호신용 부적 또는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쿄화단

도쿄화단 東京畵壇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기에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의 근대화단. 미국인으로서 일본 전통미술의 우수성을 깨우쳐준 페놀로사Earnest Francisco Flenollosa(1853~1908)에 힘입어 등장한 도쿄화단은 페놀로사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지식인이자 관료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의 사상이 주축이 되었다. 오카쿠라 덴신이 1890년(메이지 23)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곳이 초기 도쿄화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카쿠라의 사상을 이해하고 화폭에 옮겼던 화가로는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히시다 쇼菱田春章,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등이 있다. 오카쿠라 덴신은 전통적인 색채를 소중히 여기는 한편 서양회화에서 중시하던 빛, 대기감 등을 일본의 전통회화와 접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몽롱체(朦朧體)가 등장하여 동양화의 전통적인 선(線)이 일시적으로 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동양회화의 특징인 선(線)을 살리는 방향으로 회귀하였고 여기에 서구적인 사실성을 더하여 일본 근대기의 명작을 낳게 되었다.
도쿄화단의 중심이었던 도쿄미술학교는 교장이었던 오카쿠라 덴신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나 그의 수제자들과 함께 1898년(메이지 31년) 일본미술원*日本美術院을 설립하게 되면서 그 중심적인 역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일본미술원은 화단의 재야단체로서 혁신적인 실험을 통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일본미술원의 멤버로 기존 인물들 이외에 이마무라 시코今村紫紅, 고바야시 고케이小林古徑, 하야미 교슈速水御舟 등이 있다. 서양화에서 후기인상주의*나 초현실주의* 개념을 빌려 동양화에 적용하여 파격적인 작품을 시도하면서 신선하고 세련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일본회화의 전통인 야마토에*를 근대적 취향으로 변형시키는 시도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일본미술원도 분열의 조짐을 보이면서 약화된다. 그러나 오카쿠라 덴신이 사망한 후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요코야마 다이칸을 중심으로 재흥일본미술원*在興日本美術院이 다시 설립돼 분산된 힘을 응집할 수 있었다. 비록 문전(文展)에서 보이는 아카데미적 경향과는 다른 재야단체이기는 하지만 일본미술원 및 재흥일본미술원이야말로 일본화단을 선도한 가장 큰 힘이라고 하겠다.

도큐멘타전

도큐멘타전 Dokumenta(독)

1955년 이래 독일 카셀에서 4~5년마다 여름철에 열리는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회. 보데Arnold Bode의 최초의 발상 이후 ‘서구미술협회Gesellschaft für Abendlandfishe kunst’가 매년 전시회를 주관한다. 제2차세계대전 후, 독일은 동서로 분할되었지만, 카셀은 분단되기 전 독일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큐멘타전을 카셀에서 개최하는 것은 독일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고,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 또한 현대미술의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도큐멘타전은 히틀러에 의해 퇴폐예술로 낙인된 전위예술*이 다시금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여, 독일의 과거 이미지를 불식하고 문화국가로서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전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초기의 전시는 카셀아카데미의 교수 보데와 독일의 주목할 만한 예술이론가 하프트만Werner Haftmann에 의해 주관되었고, 독일을 세계에 선보이려는 입장이 강조된 경향의 것이었다. 1972년부터 획기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지만Harold Szeemann이 전시의 책임을 맡고 그 주제를 ‘개별 신화’ 등으로 한 이후 점차 테마전(展)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도큐멘타 출품작가의 선정은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초대작가도 유럽인이 압도적이지만 적어도 다음 개최일까지의 세계현대미술의 향방을 시사하고 가늠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권위와 전문성을 지닌 전시회로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