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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미술

청대 미술 淸代美術

만주족은 송화강 유역의 황무지에 나라를 세우고 7년 뒤 누르하치는 수도를 봉천奉天으로 옮기고 국호를 명明에 상응하는 청淸이라고 하였다. 1644년 북경北京으로 쳐들어오고 있던 반란군의 두목 이자성李自成(리 츠즈엉)을 몰아내기 위해 명의 장군 오삼계吳三桂가 도움을 청하자 만주족은 이 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이자성을 몰아내고 수도까지 점령하였다. 만주족은 중국문화를 깊이 숭상하였고, 중국의 관료계급제도에도 의지하여 국가를 다스렸다. 그들은 명대(明代)의 유교 전통을 이어받고자 노력하였으며,《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1729)이나 1773년부터 9년에 걸쳐 3만6천권에 달하는 백과전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도 출간하였다. 그러나 만주족은 유교사상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면에만 집착하여 사상이 시대에 맞게 발전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17~18세기에 유럽과 중국은 서로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유럽에서는 처음 17세기말에, 두 번째는 18세기 중엽에 두 차례나 중국취향(쉬노아즈리)이 유행하였다. 중국측에서는 1601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온 이래 황제를 위시하여 황제 측근이나 학자들은 서구의 학예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회화분야에서는 특히 화원화가들을 중심으로 사실주의적인 명암법*과 원근법*을 습득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청대(淸代)는 유난히 옛 것을 숭상하여 고전을 연구하고 고고학을 배우고 책, 문서, 그림, 도자기, 고대 청동기 수집이 유행하였다. 특히 건륭제乾隆帝는 수집광이었다. 건륭제가 1796년 양위하면서 내부적인 균열이 생기고 유럽 열강들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청의 황금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이후 아편전쟁, 중국을 개화시키려 했던 태평천국난의 실패를 거쳐 1911년 국권이 실추되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였다.
건축:청의 태조太祖 누르하치(재위 1619~1926)는 16세기말부터 발흥했지만, 청대 초기로 볼 수 있는 건축 유적은 천명 10년(天命, 1626)에 천도한 심양瀋陽에 집중되어 있다. 〈심양고궁〉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태조의 복릉福陵, 태종太宗(재위 1626~1643)의 소릉昭陵도 이에 속한다.
청은 일찍이 몽골 민족의 영향을 받아 라마교를 믿었으며, 태종 때 차하르察哈爾 지방으로부터 원대(元代)에 주조되었다고 생각되는 금동마카라상을 모시는 연화 정토의 실승사實勝寺, 호국을 위해 심양성 밖의 동쪽에 영광사永光寺, 남쪽에 광자사廣慈寺, 서쪽에 연수사延壽寺, 북쪽에 법륜사法輪寺를 세우고, 각 절에 대형의 마탑 1기를 건축하였다. 순치 원년(順治, 1644) 이자성의 반란을 계기로 청의 군대는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북경에 입성하면서 천도를 단행하고 반란 때문에 황폐해진 명의 자금성紫禁城 복구를 시작으로 각 지방에서도 명의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청의 조정이 굳건해지자, 성조제聖祖帝의 강희 연간(康熙, 1662~1722) 무렵부터 북경에 〈창춘원暢春園〉을 만들었고, 옥천산玉泉山과 향산香山에도 이궁(離宮)을 축조하였다. 제5대인 옹정제雍正帝(재위 1722~1735), 제6대 건륭제(재위 1736~1795)는 왕이 상주하는 〈원명원圓明園〉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 〈청이원淸頤園〉 등을 만들었다.
이렇게 이궁을 지어 왕이 상주하는 것은 명대에는 없었던 특이한 경향인데, 함풍 10년(咸豊, 1860)에 영국와 프랑스의 군대가 침략했을 때 소실되었다. 그 후 본래의 자리에 〈이화원頤和園〉이 세워져 예전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열하熱河의 승덕承德에 있는 강희, 건륭 무렵에 세운 〈열하피서산장熱河避署山莊〉은 황폐된 채 남아 있다.
청조는 천도한 후 제일 먼저 북경에 라마교* 계통의 동황사東黃寺(1651)와 경화도瓊華島의 라마탑을 세웠다. 외관은 재래의 사관과 동일하며 내부만 특색있게 만들어졌는데, 대체로 강희 연간까지 계속되었으며, 옹정 연간(擁正, 1723~1735)에서 건륭 연간에 이르면 티베트* 계통의 건축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열하 승덕의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나 수미복수묘修彌福壽廟와 같은 대규모의 복사(複寫)가 지어졌다.
내몽골과 외몽골에 중국 계통의 라마교 사원이 세워진 것도 강희 이후이며, 티베트 외관의 절이 보급된 것은 청대 후기였다. 유럽 건축의 영향을 일찍 받은 곳은 광주廣州와 같은 무역항이다. 북경에서는 교회당이 처음 세워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원명원〉의 분수와 함께 바로크*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이들 건축은 19세기 청조가 쇠퇴하는 혼란기때 모두 소멸되었지만 서양 양식의 〈원명원〉은 당시의 동판화*와 유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대체로 강희 연간까지 북경으로 천도한 후 황제들의 능묘는 북경의 동북방과 서남방 두 곳에 동릉과 서릉이 만들어졌다. 동릉은 북쪽으로 만리장성을 넘어선 흥륭현興隆縣에 있는데, 세조世祖, 성조聖祖, 고종高宗, 문종文宗, 목종穆宗의 다섯 황제의 능과 여러 후비의 능을 조성하였다. 서릉은 역현易縣에 있으며, 세종世宗, 인종仁宗, 선종宣宗, 덕종德宗의 네 황제의 능과 후비들의 능이 있는데 명대 황제들의 능묘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조성하였다. 그리고 청조에는 옹정 9년(1731) 《공정주법工程做法》, 가경 20년(1815)에 《공부칙례工部則例》를 출판하여 북경형(北京型) 건축 시공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에, 북경형이 각 지방의 주류가 되어 지방적 특징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불상:초기에는 심양에 〈황사黃寺〉(1838), 북경에 〈동황사〉(1651)라는 라마교 사원이 건축되었다. 본존을 중심으로 17세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 현재, 미래불이 안치되어 있다. 불상*의 모습은 명의 전통을 계승하여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서 인체의 묘사도 자연스럽고 단아하다. 불상이 가장 활발하게 조성된 시기는 강희, 옹정, 건륭제에 걸친 18세기이다.
강희 52년(1713)의 부인사溥仁寺 본전本殿의 삼세불, 2보살, 2비구, 18나한에는 라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북경의 옹화궁雍和宮(1723)은 라마교의 절로서, 21m가 넘는 목조미륵대상이 주목거리다. 심양의 보녕사普寧寺는 건륭 20년(1755)에 건립된 사찰인데, 이 내부에는 삼불三佛 . 18나한, 36비관음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상의 모습은 살집이 딱딱하고 생기가 없어 불교조각의 퇴화를 보여준다. 청대의 불상 조성은 일반 민중의 소망이 반영되어 선(禪)의 수행을 쌓은 나한의 염불 대상인 아미타불*을 포함하는 여러 부처, 현세의 괴로움을 구원하는 관음보살*이 많이 만들어졌다.
회화:명말 청초에는 각지에서 문인화가가 많이 배출되어 남종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들 중에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을 이어받은 소위 정통파들인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 왕감王鑑(우앙 지엔, 1598~1677), 왕휘王絮(우앙 후에이, 1632~1717), 왕원기王原祁(우앙 위앤치, 1642~1715)가 있다.
왕시민은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의 폭넓고 여유있는 화풍을 선호하였다. 왕시민의 절친한 친구이며 제자였던 왕감은 원대(元代) 문인화의 거장들을 본받아 역시 의고풍(擬古風)의 그림을 그렸다. 왕휘는 황공망, 동기창, 왕시민 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던 위대한 고전적인 대가들의 양식을 변형시켰다. 왕원기는 4왕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독창적인 화가였다.
이들 정통적인 문인화파들 이외에 개성파 화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장 창조적인 청대 초기의 60여년간을 주도했던 화가들로 팔대산인八大山人(빠따르산르언, 1625~1705), 석도石濤(스 타오, 1641~1717) 등이 있다. 팔대산인은 승려로서 세상과 등진 태도를 보였으며 당시의 회화예술에 대해서도 그러한 작풍이 배어 있다. 기운찬 감필로 제작된 그의 산수화*는 남종화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킨 동기창의 화법을 지니고 있었다. 서너개의 휩쓰는 듯한 필선으로 그린 그의 그림에는 자유분방한 묵희(墨戱)의 맛이 잘 나타나 있다.
석도는 일생을 승려로 보낸 독실한 불교도로, 만년에는 남경南京에 있던 큰 절의 주지를 지냈다. 덤불로 문지른 것처럼 메마른 필치로 제작된 그의 산수화에는 젊은 시절 강남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얻은 자연에 대한 시적 감흥이 잘 나타나 있다.
건륭 연간에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의 경제적 번영을 중심으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개성적 화가도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양주팔괴라고 하면 금농金農(진농), 황신黃愼(후앙 선), 이방응李方膺(리 황잉), 고봉한高鳳翰(까오 힁산), 왕사신王士愼(우앙 스선)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개성을 중시하고 감흥을 솔직하게 나타내어, 기교를 버리고 자유분방하게 붓을 휘둘렀다. 이들 양주팔괴의 화풍은 근대의 해상파*에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