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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

파피루스 papyrus(영)

이집트, 근동에서 널리 자라는 습지 식물(학명 Cyperus Papyrus L.), 또는 그 가지에서 채취된 필기 재료(종이의 일종). 고대 이집트에서는 3000년 전부터 사용되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도 표준적인 필기 재료였는데 이것에 글씨를 쓴 문서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4세기부터 양피지로 대체되면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잉크뿐만 아니라 페인트로도 기록되었다. 삽화가 곁들여진 파피루스로서는 이집트의 중왕조와 신왕조 시대의 것들이 남아 있으며 직조 무늬로 짠 것뿐만 아니라 고전을 해석한 서적 형태의 것들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파피루스 기둥

파피루스 기둥 papyrus column(영)

고대 이집트 건축에서 사용된 원주*(圓柱)로서, 파피루스를 모티브*로 하여 주신(柱身, shaft) 및 주두*(柱頭, capital)를 형성한 것. 꽃망울을 모방한 것과 꽃을 모방한 것이 있는데 두 경우 모두 주신은 주초(柱礎, base)에서부터 가늘어지며, 주두와 주신의 경계에는 띠 모양의 장식이 있다.

파피에 콜레

파피에 콜레 papier collé(프)

종이 따위를 찢어 붙이는 기법으로 콜라주*의 일종. 콜레란 풀로 붙인다는 뜻인데, 이 기법을 최초로 쓴 사람은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와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였다. 그들은 그때까지 현실의 일부를 그림물감으로만 그리던 수법을 진일보시켜 1912년경 캔버스*에 여러가지 종이를 붙여 미적 효과를 자아내게 하는 기법을 고안해 냈다.
이때 신문지나 나뭇결 무늬의 벽지 조각, 차표나 상표 따위의 인쇄물, 판화* 등이 사용되었다. 이같은 기성(旣成)의 물체를 붙이게 되면, 화필(畵筆)에 의한 재현묘사보다 한층 분명한 현실감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견고한 화면 구성이 요구된다. 손으로 그려진 부분에서 물체가 떠오르지 않도록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와 그림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되찾으려 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현대 미술이 처음으로 물체와 만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하리 회화

파하리 회화 Pahārī painting(영)

17~19세기 전반 서북 인도의 펀잡Punjab주와 카슈미르 일대에서 발달한 세밀화*이다. 바소리Basohli, 쿨루Kulu, 잠무Jammu, 칸그라Kangra, 굴레르Guler, 가르왈Garhwal 지역의 그림이 파하리 회화에 속한다.
라자스탄* 지역과 마찬가지로 라지푸트족들의 군소 왕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파하리 회화에서는 바누다타Bhanudatta가 15세기에 쓴 연애시를 도해한 라사만자리Rasamanjari가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였다. 라사는 연극이나 시를 통해 전달되는 특별한 정조(情調)를 말하는데 이런 느낌을 8가지로 체계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크리슈나*와 《라마야나*》의 이야기나 군주의 초상화*도 주된 주제로 나타났다. 1750년경 나디르샤의 침입으로 무갈 황실의 화가들이 파하리 지역으로 피란을 오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양식*이 등장한다. 무갈 회화*의 영향을 받아 현실적인 주제도 많이 그려졌고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합리적으로 변모했다. 라가말라, 크리슈나, 《라마야나》를 주로 그렸던 바소리 회화는 18세기경 칸그라 화파의 등장으로 영향력이 감소했는데 칸그라 화파의 양식은 고상하고 시적이며 이상주의적이다.

→ ‘라자스탄 회화’ 참조

판디야 왕조 미술

판디야 왕조 미술 Pāndya Dynasty Art(영)

남인도 타밀 나두주의 남쪽에 있는 마두라이Madurai를 중심으로 한 판디야 왕조는 전기 판디야 시대(6세기말~10세기초)와 후기 판디야 시대(1251~1310)로 나뉘어진다.
전기 판디야 시대는 팔라바 왕조*와 동시대였고 후기 판디야 시대는 촐라 왕조* 후기 이후와 같은 시대였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판디야 미술이 팔라바 미술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며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초기 시대의 미술은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칼루구말라이Kalugumalai에 있는 미완성된 〈바투반코빌Vattuvānkōvil 사원〉(8세기)이 유명하다. 시바*신에게 바쳐진 이 사원은 만다파*와 성소로 이루어졌는데 성소* 위에는 부조*와 문양으로 장식된 남방 형식의 상부구조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팔각형의 시카라*가 올려져 있다. 부조의 양식*은 팔라바의 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판화

판화 版畵 engraving, print(영)

나무, 금속, 돌 등의 면(面)에 형상을 그려 판을 만든 다음, 거기에 잉크나 물감 등을 칠해 종이나 천 따위에 인쇄하는 것. 모노타이프 혹은 우니카(unica)라 불리던, 한 점 밖에 남길 수 없었던 초기(주로 15세기)의 예를 예외로 한다면, 판화란 우선 복제*의 예술이고 또한 기술이다. 판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트럼프에서 나왔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이전의 판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명 작가 한 사람이 트럼프의 도안을 디자인하고 그것을 동판화*로 인쇄함으로써 ‘트럼프의 화가’라고 불렸던 것도 초기 판화의 민중성을 말해주고 있다. 판화는 또 조각*에 있어서 소형의 브론즈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예술작품의 복제 수단으로서도 널리 보급되어,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중반에 사진*이 발명되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초기 판화는 정치적, 종교적 선전의 수단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물론 활자도 유효한 수단이었으나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의 민중에 호소하는 데는 도상*(圖像)이 문자보다도 한층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판화 중에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도 있으나, 대개 문화사적 내지 사회사적인 기록 또는 자료로서 가치있는 것이 많다.
이와 같이 특히 사진의 발명 및 보급 이전의 판화에는 예술가 자신의 자유로운 발상에서 제작된 것도 다수 있으나 예술적, 미적 목적 이외의 이의적(二義的), 종속적인 복제 수단으로서 다뤄진 것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판화를 회화와 비교해 일종의 예술의 보급판, 염가판으로 보는 다소 소극적인 평가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근대 내지 현대에 있어서 이른바 ‘오리지널 프린트*’의 개념은 ‘오리지널리티’를 중요시하는 근대의 일반적 동향에 호응함과 동시에, 기존의 판화가 때로 감수해왔던 부차적, 타율적인 성격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또 복제의 역할이 사진에 의해 대체된 상황에서 필연적인 탈출로 일 수도 있다.
판화의 제작 과정에는 일반적으로 도안을 디자인하는 일, 그것을 판으로 새기는 일, 그리고 인쇄하는 일의 3단계가 있고, 그것에 대응하여 예술가도 회화사(繪畵師), 조각사(彫刻師), 인쇄사(印刷師)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날의 판화가 ‘오리지널’한 것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제1단계와 제2단계가 동일한 예술가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소위 화가 겸 판화가라는 ‘peintregraveur’의 개념이 이것에 해당된다.
또한 오리지널 프린트는 위의 제1, 2단계는 물론 제3의 단계, 즉 작가가 인쇄에 입회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판화에서 서명*이 하나의 가치 기준으로서 중시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이렇게 예술가 자신이 판화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면 제작되는 판화의 수도 한정된다. 이런 종류의 소위 한정판의 경우는 판화의 어딘가에 그 수를 분수(分數)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18/50이면 인쇄한 장수가 50점이고 그 중 18번째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인쇄범위 내의 장수라면 모두 오리지널*로 본다.
판화 중에서 동판화*는 전문적인 판화 출판사나 출판업자가 간행하는 것이 근대 이래의 추세이다. 근대의 유명한 판화 출판사로는 에칭* 전문의 로지에 라크리에르Rosier Lacriere, 드가Edgar Degas(1834~1917),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뭉크 Edvard Munch(1863~1944) 등이 애용하던 석판 인쇄의 크로, 채색 석판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페레(이상 프랑스), 미국에는 석판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캐리어, 또 제2차세계대전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창설된 태머린드 공방*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판화의 동향은 회화에 있어서처럼 혁신적이고 다양하다. 특히 사진의 발명과 보급은 판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사진의 고안은 복제 수단으로서의 판화에 종언을 고한 것이었다.
화가 들라로슈Paul Delaroche(1797~1856)는 사진술의 탄생을 맞아 “오늘로서 회화는 죽었다”고 탄식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판화나 회화가 기계적인 사실성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사진에 미칠 수 없다는 점을 미술가들에게 시사했다. 이것을 계기로 판화는 복제의 수단에서 오리지널한 것으로 전환했다.
휘슬러James Whistler(1834~1903), 고갱Paul Gauguin(1904~1948), 툴루즈-로트렉,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뭉크 등 세기말에 활약한 화가들의 목판화*나 석판화는 삽화적, 설명적인 성격이 강했던 종래의 판화의 틀을 대담히 타파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놀데Emile Nolde(1867~1956),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등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은 특히 목판화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구하였고, 초기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 자크 비용 Jacques Villon(1875~1963) 등은 입체주의*적 시점을 그대로 판화의 세계에 도입하였다.
현대 판화의 오리지널리티가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서적의 삽화로서 제작된 판화로, 특히 화상 앙브로와즈 볼라르Ambroise Vollard(1868~1939)가 피카소, 루오Georges Rouault(1871~1957), 샤갈Marc Chagall(1887~1985) 등에 의뢰하여 출판한 유명한 문학작품의 삽화가 그 좋은 예이다.
이 경우, 텍스트는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단지 출발점에 지나지 않고, 그 이후는 오로지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겨지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은 결코 텍스트에 정확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특히 삽화 판화의 황금시대였던 18세기 프랑스의 그것과 비교하면 명확한 것으로 텍스트와 삽화와의 정확한 대응은 현대 작품에서도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또 양식면(樣式面)뿐만 아니라, 이를 테면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1930년대에 미국에 전파된 것으로 생각되는 실크 스크린*의 유행이나, 다색 에칭*, 기타 많은 시도에 의해 미국이나 유럽의 각국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헤이터Stanley William Hayter를 중심으로한 ‘아틀리에 17*’의 활동, 또 많은 예술가가 시도한 동일한 작품에 있어서의 여러 기법의 병용 등도 종래의 우수한 ‘복제적’인 판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새로운 오리지널 프린트이다.

팔라-세나시대 미술

팔라-세나시대 미술 Pāla-Sena Period Art(영)

팔라 왕조와 세나 왕조는 750년부터 1200년까지 인도 동부의 비하르Bihar와 벵골Bengal 지역을 지배했다. 북인도에서 불교는 백훈족의 침입 이후 7세기 무렵에는 거의 쇠퇴하였으나 이 지역에서만 불교가 중요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팔라-세나 왕조의 후원 아래 불교 미술*이 성행했다. 팔라 시대의 불교는 대승불교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밀교(탄트리즘)였다. 밀교는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많이 받아들여 기존의 불교와는 성격이 달라졌다.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부르는 이 불교는 관련된 미술 형식과 함께 8~9세기에 티베트*와 네팔로 전해졌다.
이 시대 불교 미술의 중심지는 유명한 불교 대학이 있던 비하르의 날란다Nalanda이다. 방형(方形)의 승원(僧院, 비하라*)들이 서로 붙어 있는데 각각의 승원들은 중앙에 뜰이 있고 사면에 방들이 설치된 동일한 구조이다. 스투파*는 굽타 시대*의 건축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스투파에서 볼 수 있는 부조*된 스투코* 소상(小像)들은 굽타 시대 사르나트*의 조각*을 복제한 양식*이다. 벵골 동부(현 방글라데시)의 파하르푸르Pāhārpur에 있는 대탑은 이 시대 불교 건조물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팔라-세나 시대의 조각은 단단한 흑색 돌로 된 상들이 많은데 이 조각상들은 모두 정교하게 세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날란다 등지에서는 많은 청동상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청동상들은 아시아 각지로 수출되어 네팔과 티베트, 카슈미르*의 금속 조각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 회화로는 7~8cm 길이의 종려나무 잎 위에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불교 경전 삽화가 있다. 팔라의 불교회화 양식은 네팔과 티베트에 전해져 그곳의 독특한 회화 양식 형성에 기여하였다.
데칸 지방에서 발흥한 세나 왕조는 팔라 왕조를 계승하여 11세기 후반부터 벵골 지역을 통치하였다. 11~12세기에 벵골 지역에서는 힌두교, 특히 비슈누*신을 섬기는 종파가 성행하여 힌두교 미술*도 발달하였다. 세나 왕조는 12세기말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팔라디오식 요소

팔라디오식 요소 Palladian element(영)

팔라디오Andrea Palladio에 의한 비센차Vicenza의 바실리카*를 명백히 나타내는 아치*와 기둥의 조합에 대해 프랑스인이 부여한 명칭. 이러한 배치는 기둥 위에 올려진 아치가 개구부를 이루고 기둥의 엔타블러처*가 측면의 좁은 개구부의 인방보로 쓰이고 있다. 팔라디오의 바실리카에서 이러한 세개의 개구부는 더 큰 주범에 의해 형성되는 베이(bay, 기둥과 기둥 사이)로 에워싸인다.

팔라디오주의

팔라디오주의 Palladianism(영)

1715년경부터 18세기 말엽까지 지속된 영국의 주택건축물 양식. 팔라디오주의는 영국 바로크* 건축물의 과도한 장식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으며,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사상가인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 및 그의 추종자인 영국의 존스Inigo Jones(1573~1652)의 건축물과 사상 속에 내재한 고전적 순수함을 되찾으려 했다. 바로크의 인위적인 감각적 요소를 ‘지성적인’ 고전적 자연스러움으로 바꾸려 하였다.
팔라디오주의는 팔라디오가 해석한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글에서 시작되기는 했으나, 당대의 외국의 영향 특히 프랑스,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의 바로크를 거부하면서, 영국 르네상스* 건축의 시조인 존스를 회고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국민적인 운동이었다.
캠프벨Colen Campbell과 아마추어 건축가 벌링턴 경Lord Burlington은 팔라디오주의의 실제적인 선구자였다. 캠프벨은 런던 근처의 웬스테드 하우스Wanstead House를 1714년에 설계했으며, 벌링턴은 치즈윅 하우스Chiswick House(c.1723~1729)를 설계하였는데, 팔라디오의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들 외에도 윌리엄 캔트William Kent(1734년에 노포크Norfolk에 위치한 홀크햄 홀Holkham Hall을 건축하기 시작), 프리트크로프트Henry Flitcroft(1733년경 남부 요크셔South Yorkshire의 웬트워드 우드하우스Wentworth Woodhouse를 건축하기 시작), 웨어Isaac Ware(1754년 허트포드셔Hertfordshire의 로덤 파크Wrotham Park 건축) 등이 있다. 18세기 중반 경 베네토Veneto에서 일어난 팔라디오 사상의 부흥으로, 교회건축 및 주거건축이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영국 팔라디오 주의는 북미로도 전파되었다.

팔라바왕조 미술

팔라바왕조 미술 Pallava Dynasty Art(영)

인도 남부의 타밀 지역을 통치한 팔라바 왕조는 7세기초부터 9세기초까지 수도인 칸치푸람Kanchipuram을 중심으로 힌두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팔라바 왕조는 남방 형식의 힌두 사원*을 만들었으며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7세기초부터 타밀 지역에서는 팔라바 왕조의 후원 아래 높은 수준의 석조 예술이 발달하였다. 만다가파투Mandagappattu의 석굴 사원은 왕조 초기에 만들어진 예이다. 마드라스 부근의 마말라푸람Māmallapuram(현 마하발리푸람)에는 바라하Varaha 석굴, 5개의 라타rathas 성소(‘다르마라자’ ‘비마’ ‘아르주나’ ‘드라우파디’ ‘나쿨라-사하데바’) 등 많은 건축물이 만들어졌으며 〈강가*Gangà의 강하(降下)〉라는 거대한 암각 부조*도 유명하다. 또한 돌을 쌓아 만든 칸치푸람의 〈카일라사나타Kailasanatha 사원〉(8세기)도 중요한데, 이 사원의 문은 남인도 사원 형식에서 중요한 고푸라(gopura, 문)의 초기 형태를 잘 보여 준다.
활발하던 팔라바 왕조의 조형 활동도 9세기 초부터는 쇠퇴하였으며 새로이 흥기한 촐라 왕조*에 정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