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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왕

시왕 十王

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도달하는 명계(冥界, 황천)를 다스리고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명의 왕. 진광왕(秦廣王), 초강왕(初江王), 송제왕(宋帝王), 오관왕(五官王), 염라왕(閻羅王), 변성왕(變成王), 태산왕(泰山王), 평등왕(平等王), 도시왕(都市王), 오도전륜왕(五道轉輪王) 등이다.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왕이 중국에 들어와서 도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시왕사상이 전개되었다. 특히 당대(唐代)의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豫修十王生七經》에서 지장보살*과 시왕이 결합하여 종래의 현세이익적인 신앙에서 내세 구원적인 신앙으로 바뀌었다. 이 경전에 따르면, 중생들은 죽은 날로부터 7일 단위의 7번과 100일, 1년, 3년 등 열번에 거쳐 시왕에 의해 선, 악업을 심판받고 그 결과에 따라 육도 가운데 한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명부심판관의 성격이 부각되면서 독립된 신앙으로 명부전에 자리잡게 되었고 시왕상과 시왕도 제작도 성행하였다. 보통 중앙에 지장삼존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1, 3, 5, 7, 9왕의 그림을, 오른쪽에 2, 4, 6, 8, 10왕의 그림을 둔다. 시왕상의 형상은 분노형의 얼굴에 도복(道服)을 입고 손에는 홀(笏)을 쥐고 있지만 제10대왕인 전륜대왕만이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이다. 시왕도에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범한 각종 죄업에 의해 형벌을 받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시의도

시의도 詩意圖 shih-i-tú(중)

동양화의 한 화제(畵題)로, 시의 뜻을 주제로 한 그림. 명대(明代) 이후 당唐, 송宋의 시, 특히 당의 시인 이백李白(리 바이), 두보杜甫(뚜 후)나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쑤 스, 1306~1101)의 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많다.

시카고파

시카고파 Chicago School(영)

1880~1900년경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약한 미국 근대건축의 선구적 건축가들로, 이들의 상업적인 고층건물들은 근대 도시의 변모를 일신시켰다. 시카고파 건축가들은 순수예술의 형식주의*나 재래적 양식주의적인 건축에서 탈피, 합리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미학에 의거하여 철골구조를 채택하고 개구부를 폭넓은 유리창으로 대체하는 등 단순한 벽면의 처리와 구성을 지향했다.
이 파의 창시자인 구조기술자 제니William Le Baron Genny(1832~1907)는 1868년에 출간한 《건축의 이론과 실제》에서 철골조 고층빌딩의 가능성을 설명한 바 있었다. 그의 시카고 홈인슈어런스 빌딩(1884~1885)과 라이터 빌딩(1889), 버넘 사무실이 설계한 리라이언스 빌딩(1894) 등이 대표적이나, 이 파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는 설리번Louis Sullivan(1856~1924)이다. 그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하는 기능주의적 사상에 의거, 새로운 구조기술에 호응하는 새로운 표현형태를 추구했다.

시카라

시카라 śikhara(범)

북방 형식의 힌두 사원*에서 비마나* 위의 높은 탑을 시카라라고 한다. 이 탑은 작은 구성 요소들이 수직적으로 반복되어 띠를 이루면서 위로 전개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줄어든다. 탑신 부분을 간디(gandi), 꼭대기 부분을 마스타카(mastaka)라고 한다. 마스타카는 다시 아말라카*(āmalaka)와 칼라샤(kalaśa)로 나뉘어진다. 같은 북방 형식 중에도 간디 부분에 많은 작은 탑들을 조각한 형식과 그렇지 않은 형식이 있다. 남방 형식의 힌두 사원*에서는 탑의 꼭대기 부분만을 시카라라고 한다. 그 모양은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이거나 원형의 돔* 지붕, 사각형의 아치* 지붕 등 여러 가지이다. 시카라 위에는 칼라샤와 비슷하게 항아리 모양의 작은 탑인 스투피(stūpi)가 있다.

→ ‘힌두 사원’ 참조

시퀀스 사진

시퀀스 사진 sequence photography(영)

일련의 움직임을 순차적으로 연속하여 촬영한 사진을 말한다. 예를 들어 투수의 연속적인 투구동작이나 상황의 전개를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것.

시필묘

시필묘 柴筆描

→ ‘인물십팔묘’ 참조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 新古典主義
Néo-Classicisme(프)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라클레네움, 파에스툼 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 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학자들은 저술을 통해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였으며, 카일루스Comte Claude-Philippe Caylus(1692~1765)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1752~1767)이나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1720~1778)의 <로마의 위대성>(1751), <로마의 유적>(1756), <로마인의 사치와 건축에 관하여>(1761)는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은 그의 저작 <그리스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의 모방에 관한 연구Gedanken über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1755), <고대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hums>(1764) 등을 통해 이 양식의 미학적 근거를 완성했다.
화가 멩스Anton Raffael Mengs(1728~1779)는 로마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성이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코레지오Correggio(1490~1534), 티치아노Tiziano(1485~1576) 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 – 아폴로 벨베데레, 라오콘* 등 – 의 제반 요소들의 기초에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그의 <파르나수스>(1761)나 동료 해밀턴Gavin Hamilton(1723~1798), 비엥Joseph-Marie Vien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들이 나타났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대혁명 당시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나중에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우스가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브루투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다비드의 성과는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에게 계승되어 프랑스 회화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François Gaspard & Lambert Sigisbert & Nicolas Sébastien Adam, 독일의 랑그한스Carl Gotthard Langhans(1732~1808), 프랑스의 샬그랭Jean-François Chalgrin, 브로냐르Alexandre Théodor Brongniart, 르두Claude Nicolas Ledoux(1736~1806) 등이 대표적이며,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Antonio Canova(1757~1822)와 토발트센Bertel Thorwaldsen 등이 활발히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건너갔으며, 조각가 파워스Hiram Powers(1805~1873), 그리너프Horatio Greenough(1805~1852), 화가 반델린John Vanderlyn 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부흥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19세기에 일어난 ‘신그리스Neo-Greek’ 운동과도 다른데, 왜냐하면 그리스 정신을 얘기하는 여타의 저작들이 사실은 거의 모두 후기 헬레니즘과 로마의 복제품들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이다.

신광

신광 身光 vali-cakra(범)

→ ‘광배’ 참조

신구상회화

신구상회화 新具象繪畵
Nouvelle figuration(프)

1960년대 초부터 파리, 런던, 뉴욕 등지에서 부상한 구상 회화의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 신구상은 프랑스 비평가 페리에J. L. Perrier와 라공Michel Ragon이 전후 추상미술*에 대립하여 1960년대 초 새롭게 부활한 구상화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 파리 마티아스 펠스 화랑에서 열린 두 번의 전시회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1960년대 초 등장한 구상화의 경향들은 가시오- 탈라보Gerald Gassiot-Talabot가 정의한 서술적 미술,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가 정립한 누보 레알리슴 *등과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어떤 비평가들은 팝 아트*를 이 경향 속에 넣어 이해하기도 한다. 또 루시 스미드Edward Lucie-Smith와 같은 평론가는 그의 저서 《70년대》에서 구상적 회화라는 타이틀 아래 세 가지 형상성을 구분하고 있는데, 바로 ‘사실주의자 회화’(여기에는 포토리얼리즘 등이 포함된다), ‘구상적 표현주의’ ‘서술적 구상*’이다. 신구상의 특징은 “추상의 폐허 위에서 신구상의 개념이 정의되기 시작한다. 이는 과거로 되돌아가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고 그것을 나타내줄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창조하기 위해 탄생한다”라는 장 루이 페리에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다미Valerio Adami(1935~ ), 에로Gudmunder Gudmundsson Erro, 모노리Jacques Monory, 텔레마크Hervé Télémaque 등이 보다 그 표현 방식을 분명하게 한 작가들이다. 반면 아펠Karel Appel(1921~ ), 베이컨Francis Bacon(1909~1992),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와 같은 초기의 작가들은 이들보다 덜 냉정하고 객관적인 구상감각을 보였다. 이들은 일상적 현실과 신화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분석하고 미디어와 정치 등 인간의 동시대적 상황을 드러내려 했다. 이들이 사용한 기법도 BD, 영화기법과 유사한 분할, 사진과 에피스코프의 사용, 밋밋한 색조의 아크릴화 등으로 서로 유사하다.

신농도

신농도 神農圖

동양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신농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 중 하나이다.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제약법(製藥法), 시장을 개설하여 교역(交易)을 하는 법 등을 처음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농업의 신, 의약(醫藥)의 신, 역(易)의 신, 불의 신으로 숭앙된다. 그림에는 대체로 그가 풀옷을 입고 풀을 맛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삽화나 《성군현신상화책聖君賢臣像畵冊》(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농사의 신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지고 있다. 7세기에 축조된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에는 여러 신선들 외에 농사의 신, 야철(冶鐵)의 신, 제륜(製輪)의 신 등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전설적인 인물들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중 농사의 신은 흰 뿔과 푸른 눈을 한 사람의 형상으로 오른손에 벼이삭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