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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

파고다 pagoda(영)

→ ‘미얀마 미술’ ‘스투파’ ‘탑’ 참조

파괴미술

파괴미술 破壞美術 destructive art(영)

폭력과 파괴라는 20세기의 특징적인 현상이 현대 미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1960년대 전반기엔 각국 출신의 여러 미술가들이 제2차세계대전 이래 인류가 행한 파괴를 유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파괴와 폭력을 창조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하여 파괴미술은 자족적인 하나의 미학으로 부상했다. 이 미술은 대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래서 청중은 계속되는 파괴행위로 변형된 대상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변화 과정은 결과로 생기는 파편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로 간주되었다.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는 스스로 폭파하는 기계를 전시했고, 토슈는 타자기를 때려부수었으며, 래덤John Latham은 스쿱(Skoob:books의 철자를 거꾸로 함)탑을 만들어 폭파시켰다.
슈라이브Werner Schreib는 낙화술(烙畵術)을 이용해 불로 이미지를 그렸다. 메츠거Gustave Metzger는 나일론 시트를 파괴시키는 데 산(酸)을 이용했다. 바이락Tosun Bayrak은 피와 동물의 시체를 사용한 거리의 이벤트로 주목을 받았다. 사실 대부분의 행위와 해프닝*은 공격과 파괴적 행위를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1966년 런던에서 ‘예술에 있어서 파괴에 관한 심포지엄Destruction in Arts Symposium’이 메츠거와 샤키의 준비로 개최되었다. 10개국에서 2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참석했고 심포지엄 기간에 제시된 파괴미술의 실례들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언론과 대중, 그리고 비평가들의 열광과 방해를 함께 받았다. 주최측은 예술에서 파괴기법이 세계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사회 현실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공격성이 예술을 통해 순화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폭력이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두번째 심포지엄이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파노라마

파노라마 panorama(영)

그리스어의 ‘panhoran(모두가 보인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회전화(回轉畵) 또는 전경화(全景畵)라고도 한다. 배경을 둥글게 하고 원근법*을 이용하여 원경(遠景)을 그리고, 전경(前景)에는 인물이나 기타 다른 입체적 모형을 놓고 조명하여 도시, 전투, 역사적 장면 등의 전모를 제시, 현실감을 자아내게 한 그림을 말한다. 바로크*의 무대 장치에서 출발하여 18세기말 파리, 런던에서 실현되었고, 19세기 후반, 전장의 정경을 그리는 데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크게 유행되었으나 속임수적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흥미가 떨어지자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쇠퇴하게 되었다.

파르낫소스 산

파르낫소스 산 Parnassus Mt.(이)

그리스 중부 포키스 지방에 있는 해발 2,457m의 산. 시와 음악의 신 아폴론과 뮤즈 및 디오니소스, 님프들의 영지(靈地)로 알려져 있으며, 산의 남쪽 등성에는 아폴론의 신탁(神託)으로 알려진 델포이 성지가 있다. 그림과 시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파르바티

파르바티 Pārvatī(범)

시바*의 배우자로서 히말라야 산신의 딸이다. 신들은 타라카Tāraka라는 악마가 자신들을 괴롭히자 시바와 산신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타라카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러나 시바는 계속 고행과 명상에 몰두하여 후손을 얻을 수 없었다. 파르바티 역시 시바를 따라 심한 고행을 지속했고 이런 파르바티를 사랑하게 된 시바는 파르바티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신 사이에서는 전쟁의 신인 스칸다Skanda가 태어났고 이 신이 타라카를 죽이게 되었다. 미술에서 이 이야기는 파르바티를 표현하는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파르티아 미술

파르티아 미술 Parthian Art(영)

파르티아는 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뒤인 기원전 247년(혹은 239년) 이란에서 등장한 새로운 왕조로 224년 사산* 왕조에 정복당했다. 기원전후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로인 실크로드*가 완비되었는데 그 중간에 위치한 파르티아는 중계 무역을 독점하였다. 중국 문헌에서는 파르티아를 ‘안식국(安息國)’이라고 하였다. 파르티아 미술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여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측면도 있지만 그리스와 이란 미술을 절충한 그레코-이란 양식이나 이란 고유의 양식을 보여주는 면도 있다.
파르티아의 주요 도시 유적으로는 크테시폰Ctesiphon, 하트라Hatra, 니사Nisa 등이 알려져 있다. 평면이 직사각형인 헬레니즘의 도시들과는 달리 원형인 파르티아의 도시들은 요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트라 신전에서는 파르티아의 특징적인 건물 형식인 둥근 천장의 이완(iwan)을 볼 수 있다.
파르티아의 조각*은 하트라, 아수르Assur, 팔미라Palmyra,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 등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처럼 마애부조를 많이 제작했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임을 알 수 있는 조각상들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아케메네스 미술에서는 인물을 측면관으로 표현했지만 파르티아 미술에서는 정면관을 엄수하고 있어 이 점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왕의 초상을 각인한 화폐도 제작되었고 무덤에서는 테라코타* 소상(小像)이 다수 출토되었다.
공예품으로는 금으로 된 귀고리, 은제각배(銀製角杯), 유리기(瑠璃器) 등이 있다.

파묵

파묵 破墨

수묵화*의 한 용묵법(用墨法). 먹을 깨뜨린다는 뜻으로 ‘담묵(淡墨)을 사용하여 농묵(濃墨)을 깨뜨린다’(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사산수결寫山水訣》)든가, ‘농묵을 사용하여 담묵을 깨뜨린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먹의 농담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먹면 외에 붓에 의한 윤곽선을 병용하기도 한다.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은 “파묵법이란 옅은 것은 짙은 것으로 깨뜨리고, 젖은 것은 마른 것으로 깨뜨리는 방법이다”라고 했고, 반천수潘天壽(탄 티앤서우)는 용묵에 대해 “먹이 마른 후에 다시 겹쳐 그리는 것을 적(積)이라 했고, 먹이 마르지 않은 축축한 상태에서 겹쳐 그리는 것은 파(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파묵법을 사용하는 것은 먹빛의 농담이 서로 침투하여 매끄럽고 생기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성당(盛唐)시기인 8세기초에 나타났으며, 처음에는 산수수석화(山水樹石畵)에만 사용되었다. 정창원正倉院의 〈조모립녀도鳥毛立女圖〉에 나오는 바위에 그 예가 보인다. 발묵*보다 앞서 나타난 용묵법으로, 후세의 예로는 부벽준*이 전형적이다.

파비용

파비용 pavillon(프) pavilion(영)

본체의 건물에서 세분되어 나온 부분적 건조물. 본체의 중앙부 또는 양쪽 끝과 한쪽 구석부분에 약간 높은 블록으로 되어있고, 장식이 더 많아서 본체와 구별된다. 정자(亭子) 또는 작은 정원건축(庭園建築)처럼, 간단한 부속 건물이나 여흥을 위한 건물. 박람회나 전시회 등의 회장에 설립한 진열관.

파사드

파사드 façade(프)

거리 또는 트인 공간 쪽을 향해 있는 건물의 주된 정문으로 주 현관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조각으로 장식되는 건물의 익랑* 끝과 서쪽 끝의 외부면을 가리킨다. 건물의 정면, 건축 요소들과 벽면 위의 그 조직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파스텔화

파스텔화 pastel painting(영)

파스텔로 그린 그림. 파스텔은 빛이 있는 가루 원료를 반죽하여 굳힌 것으로, 옛날에는 석고 또는 백점토를 원료로 써왔으나 지금은 물에 거른 탈산석회(脫酸石灰)로 만든다. 아무런 매체*나 도구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스텔화를 그리는 방법은 다른 그림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유화는 그려진 색채가 그려지기 전의 건조한 색채와 차이를 보이지만 파스텔화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스텔 화가는 사용하는 색채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파스텔화는 착색이 안정적이지 못한 단점이 있으며 가벼운 접촉이나 변화에 의해서도 손상되기 쉽다.
정착제를 써서 이런 단점을 극복할 수도 있지만 파스텔화의 특질인 표면의 질감을 훼손시키고 색깔의 광채를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 유리를 씌우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최선의 보호책이다. 일반적인 바탕 재료는 무색지가 쓰인다. 파스텔의 색조는 프레스코*나 과슈*에 가깝지만, 광채를 발하는 분말 표면은 파스텔 특유의 속성이다.
파스텔화는 15세기말부터 분필 그림의 활용에서 유래하였다. 모든 색깔을 사용하는 파스텔화는 풍경화가인 동시에 동판화가였던 티일러Fohann Alexander Thieler와 마담 베르네렝Mme. Vernerin 등이 18세기 전반에 발명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8세기말의 랑타라Simon Mathurin Lantara는 파스텔을 풍경화*에 최초로 사용했던 미술가의 한 사람이었다.
19세기 전반에 파스텔화는 퇴조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와 더불어 부활하여 대중화되었고, 오늘날에는 파스텔화의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그어진 한 획마다 나타나는 효과와 밋밋한 색깔의 부위를 감싸는 윤곽, 그리고 색깔들이 뒤섞이지 않고 나란히 병치되는 개방적인 기법의 가치는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