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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언어

미술과 언어 Art and Language, A&L(영)

제2차세계대전 이후 영미의 분석 철학과 그 방법론에 입각한 미학의 전개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1968년 영국에서 결성된 그룹. 미술과 언어는 일차적인 매체로 언어를 선택하고 손으로 만든 완성품을 거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예술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개념(언어)의 분석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서 의미론이나 문헌학의 느낌을 주는 복잡한 글이나 논문을 만들어 이를 출판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화랑*에 전시한다. 작품을 발표하는 방법도 인쇄물, 마이크로 필름, 세미나 등 다양하다. 그 결과, 전통적인 표현 수단은 극도로 억제되고 순수하게 언어에 의한 표현이 확립되었다.
미술과 언어 그룹은 처음에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미니멀 아트* 이론을 제기하는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후 예술의 개념에 관심을 두고 과학자들의 논문이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예술가들의 논문도 예술로 간주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미술의 언어학적인 측면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철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비평가들의 평론에 대항하였다. 1969년 5월에 창간된 정기간행물 《미술과 언어》의 부제인 ‘개념미술잡지’에서 알 수 있듯이, 미술과 언어는 미술을 문학적이고 개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미국에서는 코주스Joseph Kosuth(1945~ )가 편집장을 맡았으며 르윗Sol Lewitt(1928~ ), 롱Richard Long(1945~ ), 디베츠Jan Dibbets(1941~ ) 등 많은 개념미술*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1960년대말 미술과 언어 그룹은 분석 철학 뿐만 아니라 사회학과 논리학, 언어학, 인류학 등에서 개념과 도움을 얻고자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했다. 예술 개념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이 그룹은 1970년대 중반에 펴낸 저작물을 통해 예술 산업에서의 경제적 하부 구조, 즉 예술의 역할 등으로 그 관심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출간한 저서들의 모호한 내용과 외부인에 대한 지적인 허세와 위협적인 태도는 대부분의 비평가들로부터 냉혹한 비판을 받았다.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실험

미술과 테크놀로지의 실험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영)

→ 이에이티

미술관

미술관 美術館 museum(영, 독)

박물관에서도 특히 미술 작품의 수집과 보존, 전시를 담당하는 시설. 이 명칭의 어원인 뮤제이온(museion)은 뮤즈*에서 비롯되었다. 뮤즈 여신을 경배하기 위해 창건된 신전이 고전적 개념의 박물관으로서 종교적 봉헌물들을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신앙심을 고양시켰다. 한편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자 미술관은 3세기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ios Ⅰ가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던 거대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시대의 박물관은 개인 소장품을 진열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장소였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원*이나 교회들이 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따라서 종교적 경험을 예술 형태로 시각화하는 장소로서 이해되었다. 미술품이 그 자체의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이며, 1539년 지오비오Paolo Giovio가 글에서 자신의 소장품을 ‘뮤자에움(musaeum)’이라고 지칭함으로써 미술관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관은 귀족들이 자신의 귀중품을 소장, 진열하여 과시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렀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현재와 같은 공공 미술관은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3년 현재의 루브르미술관의 전신인 ‘중앙미술관Musée Central des Arts’이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대혁명이 내세운 평등의 이념에 따라 예술의 공유를 표방함으로써 미술관의 근대적인 개념 정립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개방 하루만에 3천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이 도난을 당하자, 루브르미술관은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고 시대별, 종류별, 재료별로 구분하여 관리할 수 있는 기초를 세움으로써 오늘날 미술품의 보존과 관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에카테리나 여제Ekaterina Ⅰ의 개인 컬렉션*을 소장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일반 대중에게 문을 개방하였다. 이처럼 오늘날 세계의 주요 미술관은 대부분 시민 사회의 성립 이후 귀족이나 왕실의 수집품이 국가에 헌납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한편 19세기초에는 최초의 개인 미술관인 영국의 덜위치갤러리Dulwich Gallery가 탄생하였고, 특히 독일의 글리토테크Glytothek와 알테스미술관Altes Museum 등은 당대 유럽뿐 아니라 20세기초 미국 미술관 건축의 표준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령상 미술관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미술관의 주요 사업으로는 자료의 수집과 보존, 관리 및 전시,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 강연회, 연구회 등의 개최, 간행물의 제작 및 배포 등이 있다. 그 밖의 조건으로는 일반적으로 그 자료가 1백점 이상일 것, 1명 이상의 학예연구원, 일정 크기의 건물 및 토지, 100㎡ 이상의 전시실 혹은 2,000㎡ 이상의 야외 전시장, 일정 기간의 전시(연간 90일 이상 개방하되, 1일 개방 시간은 4시간 이상), 그리고 수장고와 사무실, 혹은 연구실과 자료실, 강당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만 설립이 가능하다. 또한 미술관은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작품을 매매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은 단순히 예술품의 수집과 저장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교육을 위한 사회적 기능까지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미술관은 열린 공간으로서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서 수동적인 관람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생산적인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술비평

미술비평 美術批評 art criticism(영)

시각예술 분야에서 미술 작품의 미학*적인 가치나 특성을 평가하는 일. 작품을 설명하고 해석하여 그 가치를 판단함으로써 더 나아가서는 창조 활동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평의 방법이나 태도는 평자의 세계관이나 미적 기준에 따라 달라지며, 현대의 미술 비평에서는 미술사가가 비평가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리드Herbert Read(1893~1968)나 이탈리아의 벤추리Lionello Venturi(1885~1961)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미술비평을 예술 작품에 대한 미적 가치판단이나 미의 이론추구로 이해한 벤추리의 견해에 입각해 보면, 고대 이래로 미술이론가나 미술사가는 모두 미술비평가로 간주될 수 있다. 미술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유사 이래 미술이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미술비평이 독자적인 대상과 방법을 가지고 행하는 독특한 평론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제노크라테스Xenocrates가 최초의 미술비평가로 알려져 있으며, 미술을 지적이고 이성적인 활동으로 이해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에 미술비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이 분리됨에 따라 비평의 독자적인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고전미의 이상으로 ‘고요한 단순미와 웅장함’을 강조하였던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이나, 《라오콘*Laokoön》(1766)에서 시간과 공간을 기준으로 예술을 구분한 레싱Gotthold E. Lessing(1729~1781)이 당시의 대표적인 비평가들이다. 특히 살롱*평으로 등단한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는 19세기 이후 미술비평이 하나의 전문화된 영역으로 확립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이전의 미술비평은 개별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검토하기보다는 미술의 도덕적 목표와 이상(진선미)을 일반화하는 작업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경제적 후원자가 소수의 권력자로부터 일반 시민계급으로 이행하였고 결과적으로 미술품 시장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예술가와 애호자의 중개자로서 대중의 취향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비평가들은 특정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평가의 대상도 동시대 미술로부터 과거의 작품에까지 널리 확대되었으며 미술비평은 독립된 지적 활동의 한 분야로 성립되었다.
또한 19세기에는 대규모 미술 전람회가 성행했고, 신문이 대중에 대량 보급되면서 신문을 통한 본격적인 미술비평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1867)와 같은 문인이 쓴 살롱 미술비평은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지금까지도 미술잡지나 저서 출판 등 저널리즘은 미술비평의 주요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기존 미술의 표현양식과 개념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20세기에는 수많은 미술운동들이 새롭게 대두되었고, 일부 비평가들은 옹호자 또는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그들을 선도하였다. 영국의 비평가 프라이Roger Fry는 대중이 후기인상주의*에 친숙해지도록 도와주었으며,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는 전후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술사

미술사 History of Art(영)

미술작품을 조사 연구하고 그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학문으로서 회화*, 조각*, 건축, 공예* 작품 자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전기, 기법 그리고 표현 내용의 연구 등도 포함한다. 또한 작품을 감정하고 평가, 분류, 해석하는 것, 사적 자료의 수집 등도 미술사의 중요 과제이다. 고대의 유적과 유품의 조사, 귀속(歸屬)의 결정 등은 일반적으로 고고학(考古學)의 분야에 속하지만, 고고학과 미술사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관계로 미술사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미술사학자는 역사적 관점에서 미술 전통의 양식 및 형식상의 전개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존하는 미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에는 플리니우스Plinius(c.23~79)가 쓴 《자연사Naturalis Historia》(1세기)와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그리스 주유기(周遊記)Periegesistes Hellados》(2세기)가 있다. 전자는 연대기 순으로 명작들을 해설하는 형식이고, 후자는 미술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미술사 기술방식들은 후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자연사》의 회화와 조각에 관한 장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학자들이 당대의 제반 예술적 업적들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할 때에 하나의 유용한 모델로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c.1378~1355)의 《비평사》를 시발점으로 하여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의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enti architetti pittoroi et scultori Italiani》(1550)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특히 바자리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은 ‘제 양식의 뿌리와 원인을,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 예술이 진보하고 혹은 쇠퇴하는 가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생성, 완성, 쇠퇴를 반복하는 역사적 순환과정을 미술사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이같은 바자리의 정신을 이어 받은 멘더Karel van Mander(1548~1606, 네덜란드), 리돌피Carlo Ridolfi(1594~1658, 베네치아), 말바시아Count Carlo Malvasia(1616~1693, 볼로냐), 잔트라르트Joachim von Sandrart(독일) 등 많은 ‘열전사가(列傳史家)’들이 등장하였다.
한편 동시대 프랑스의 펠리비앙André Félibien(1619~1695)이나 이탈리아의 벨로리Bellori(c.1615~1695)같은 이론가들은 회화론이나 예술가 열전의 형식으로 역사 속에 미의 이론을 도입하려고 했다. 또한 아카데미*에서는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의 모방을 중시함으로써 역사적인 지식을 중시하였다.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는 18세기 후반 양식의 변천에 의한 역사의 전개를 규명한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의 저서 《고대 미술사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는 조각과 회화를 당대 민족정신의 가장 고귀한 표상으로서 취급하였다. 독일어권의 여러나라에서 미술사에 아카데미적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이러한 빈켈만의 견해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로서의 역사 철학을 얘기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에 의해 강화되었다. 헤겔 이후에는 미술의 양식적 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둬 텐느Hyppolyte Adolphe Taine는 이를 민족과 환경, 시대로, 젬퍼Gottfried Semper는 기술의 발달로 설명하였다. 한편 미술을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룬 사가들 중에는 스위스 출신의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유명하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미술사는 학문으로서 엄밀성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인상주의*와 같은 19세기 미술운동의 영향과 ‘순수 시각성(pure visibility)’의 미학 이론은 오로지 형식*에 대한 분석으로서의 미술사를 추구하는 경향을 낳았다.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르크하르트의 제자인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과 빈의 리이글Alois Riegl(1858~1905)을 들 수 있다. 특히 뵐플린은 상호 대립적인 개념들을 서로 짝지음으로써 미술양식의 특성과 발전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포시용Henri Focillon(1881~1943)이 예술사의 본질에 대한 생물학적인 개념을 통해 형식주의*적 접근 방식에로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양식사적 관점과는 대조되는 시각으로는 주제나 내용에 초점을 맞춘 도상학*적 연구(말레Émile Mâle,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빈트Edgar Wind), 시대의 정신적 배경을 중시하는 경향(바르부르크Aby Warburg), 게슈탈트*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원용하는 심리학적 방법(곰브리치Ernst Hans Gombrich) 등이 있다.
현재 미술사는 1844년 베를린 대학을 시작으로 많은 나라에서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1932년 런던에서는 미술사만을 다루는 코트올드 미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미국 대학에서는 20세기초부터 활발히 연구되었는데, 주로 고대 고전기 이후의 서구 미술의 양식상의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미술을 위한 일정지분투자

미술을 위한 일정지분투자 the percent-for-art(영)

공공건물을 건축할 때 건설 예산액의 일정지분(대개 1%)을 예치해 미술품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미국 정부에서 1960년대 말에 시작한 제도. 현재 미국의 50주 중 약 절반 정도의 여러 도시와 카운티(county)에서 시행중이다. 관(官)주도의 이런 미술진흥정책으로 말미암아 미술의 본질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1960년대 말에 일어나게 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떠나 공공미술*이라 불리는 큰 건축적 규모를 요구하는 대지미술*과 그 밖의 다른 환경미술* 형태를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 ‘공공미술’ 참조

미술품 경매

미술품 경매 美術品競賣 auction(영)

화상*(畵商)이나 골동품점에서 상설로 판매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 소장품 등을 경매 회사를 통해 매매하는 것. 처음에는 재산상속 분할을 위해서 주로 이용되었던 미술품의 경매는 17~18세기 이래 서유럽에서 일반인의 수요와 작품을 연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보급되었다. 특히 19세기 이후에는 특정 수집가의 매매, 화가 개인의 매매 혹은 미술상 상호 간의 작품 교환 수단으로 각종 경매가 성행하였고, 지금까지도 미술품의 유통과 가격 결정 등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구미에서는 보통 공개적으로 경매회사가 주최하며 사회자의 경매 호성에 대해 내장자가 응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한 개인이 대량으로 파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다수의 경매 기탁자를 기다려 벌어진다. 기탁자가 요구하는 최저 가격을 붙여 목록이 작성되면, 일반 수요자에게 경매에 앞서 미리 품평을 시키는 것이 상례이다. 경매 당일 수요자(화상, 일반인)들이 모여 주최자를 중심으로 값의 경합을 벌이며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이 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대표적인 경매회사로는 소더비Sotherby’s와 크리스티Christie’s가 있다. 소더비사는 1744년 최초로 런던에서 서적 경매를 시작하였지만, 미술품 경매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보다 20년 후에 설립된 크리스티사이다. 전세계 미술품 경매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이 두 회사는 고가의 예술품에 대한 매매를 의뢰받아 자사의 감식능력과 신용을 바탕으로 구매자들에게 이를 판매하는 중개 역할을 한다. 경매회사는 매매 당사자 양측으로부터 중개 알선에 따른 봉사 수수료를 받는 대신 매매 차익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경매에 참여한 사람뿐만 아니라 낙찰자 개인에 대한 신분을 철저히 보장한다. 이러한 경매제도는 숨겨져 있던 예술품들이 드러나고 여러 사람이 소유에 대한 동등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위작(僞作)과 모작(模作)을 가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미술품의 중요한 거래 방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미식 구조

미식 구조 楣式構造

건축용어. 입구 상부구조에서, 위로부터의 하중을 지탱하는 수평체 상인방과 관련시켰을 때 기둥과 보*에 의한 구조 형식을 일컫는다. 아치*, 궁륭*, 돔*을 사용하는 아치식 구조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이집트나 그리스 신전이 미식 구조의 전형이다.

미얀마 미술

미얀마 미술 Myanmar Art(영)

11세기경 미얀마족에 속하는 아노라타왕Anowratā(재위 1044~1077)이 미얀마를 통일해 파간왕조Pagān(1044~1287)를 세우기 전까지 미얀마에는 2개의 중요한 종족이 있었다. 남부에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西)몬Mon족이 타통Thaton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북부에는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표국(驃國), 즉 퓨Pyu족의 나라가 있었다. 표국의 유적은 하린, 베으크타노, 프롬Prome에 전하고 있다(5, 6~9세기). 프롬을 중심으로 대승불교가, 타통 일대에는 소승불교가 성행했는데, 아노라타왕이 타통을 정복한 후에 미얀마에서 성행하고 있던 밀교나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한 아리교 등을 엄격한 스리랑카계 소승불교로 통일시켰다.
11~13세기에 걸쳐 번영한 파간왕조는 조형 활동도 매우 활발했으며 특히 파간 지역은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파고다가 5,000기 이상 만들어졌다. 보통 파고다라고 하는 미얀마의 사탑(寺塔)은 고탑형(高塔形)으로서 불탑 형식인 제디(zedi)와 사당 형식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제디는 내부가 꽉찬 종(鐘)모양의 스투파*로서 스리랑카의 스투파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층의 기단을 겹쳐 쌓고 정상에는 스리랑카식의 원추형 상륜을 올려놓거나 가늘고 높은 티(hti, 미얀마어로 산개傘蓋라는 뜻)를 얹은 형식이다. 사당 형식은 두터운 벽의 탑신(塔身) 안에 불상*을 모신 감실을 갖추고 윗부분에는 시카라*나 제디에서 볼 수 있는 높은 탑을 올려 놓은 것으로서 12세기부터 등장한다. 유명한 파고다로는 11세기의 난파야Nanpaya, 슈베다곤Shwe Dagon, 아난다Ananda, 페틀레이크Petleik의 탑과, 12세기에 조영된 타트핀유, 슈그기탑, 13세기의 마하보디, 민갈라제디Mingalazedi, 티로민로 탑이 있다. 특히 아난다탑은 불교의 탑 형식과 힌두 사원*의 높은 탑을 혼합하여 미얀마식으로 재구성한 호화로운 탑이다. 타통이나 페구Pegu, 랑군Yangon에 남아 있는 탑은 모두 근세에 복원한 것이다. 18세기에 재건된 약 112m 높이의 〈슈베다곤탑〉(랑군 소재)은 황금으로 도장되어 있다.
조각품으로는 인도 굽타시대* 양식의 청동제 소불상(小佛像)과 금은제의 작은 상들이 있고, 공예품으로는 은제 사리 용기가 알려져 있다. 불전도*나 본생담*을 새긴 석판이나 테라코타*가 파고다에 장식되어 있었는데 모두 인도 팔라 시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파간시대에 속하는 불상은 석가상이나 과거사불(過去四佛)에 한정되어 있는데 투명하고 얇은 대의를 걸친 불상 형식은 역시 팔라 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난다탑〉(1090경)의 감실에는 도금을 한 10m 이상의 목조 불상 4구가 모셔져 있으며 불전도나 본생담을 새긴 부조판도 여러 점 남아 있다. 미얀마의 불상은 열반상 및 항마촉지인과 시무외, 여원인을 한 형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본생담과 불전도를 주제로 한 벽화도 파간시대에 제작되었다.

미의식

미의식 美意識
aesthetic consciousness(영) äthetisches Bewuβtsein(독)

실재하는 것의 현상으로부터, 또는 예술 작품을 제작하거나 감상할 때에 일어나는 감정, 즉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또 산출할 때 작용하는 의식. 인간의 예술적인 태도는 단순히 미적 감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 의한 감정도 있다. 따라서 이 감정에 관한 의식에도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있는데, 여기에 미적 감정이 수반되어 미적인 것을 수용, 예술 제작이나 감상이 가능하다. 이 감정은 인간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생겨나는데, 실재하는 것과 예술 창작 양쪽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거기에는 감지 방식이나 미적 성질에 따라서, 미적인 것이라든가 숭고*한 것, 비극적인 것이라든가 희극적인 것 등이 있다. 예술 작품 속에 형상화되어 표현되는 것에 대한 미의식은 감성에 의한 수용적 측면에서만 이해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능동적인 측면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심리학적 입장에서 미의식은 미적 태도에 있어서의 의식 과정을 가리키며, 철학적 관점에서는 미적 가치에 관한 직접적 체험을 의미한다. 미의식에는 그 활동 형식으로 보아 미적 향수*와 예술 창작의 두 측면이 있다. 심리적 과정에서 보면 양자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구별되며, 각각 미의식의 수동적, 수용적 측면과 능동적, 생산적 측면을 의미하고 서로 대립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부분의 미학* 이론에서는 미의식을 설명할 때 미적 관조*, 향수의 문제를 그 중심에 두었으며, 예술 창작을 말할 때에는 이것을 부차적이며 별개의 것으로 고찰하고 때로는 아주 제외시켜버렸다.
그 원인으로서는 향수는 자연미에 공통되지만 창작은 예술의 경우에 제한되며, 따라서 향수는 공중(公衆)의 체험으로써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경험되는 성질의 것인데 비해, 창작은 본래 예술가들이 체험함으로써 한층 전문적이고 특수한 경험이라는 것, 또한 창작은 기교의 규칙에 따라 습득되어야 할 영역을 넘어서 천재의 발동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비합리적 성질을 띠는 동시에 보통은 미학연구자에게 직접 체험될 수 없으므로 실제로 그 학문적 고찰이 곤란하고, 더욱이 창작은 그 자체가 종종 순수한 미의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비(非)미적 계기를 내포하고 육체적 활동도 불가결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향수의 의식이라 하더라도, 미적 가치가 있는 객체를 자기의 상관자(Korrelat)로서 성립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거기에는 이미 어떤 형태의 생산적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반대로 창작 활동의 실제에서 보아도 그 과정 속에는 향수의 계기가 거의 불가결하게 개입해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창작의 종말점에 있어서 그것이 그대로 작품의 향수로 전화 혹은 접속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향수와 창작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하고, 양자가 적으나마 본질적 부분에서 통일적으로 파악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결코 부당하지는 않다. 게다가 미학의 대상이 주로 예술미이며 예술미의 본질이 창조성에 있다고 한다면, 예술 창작의 문제가 미적 향수의 문제와 대등한 자격으로 다루어지거나 오히려 이에 대하여 우선권을 갖는다고 봐야 할 이유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학적 의미의 미의식은 미적 태도에 있어서의 의식이다.
미의식을 구성하는 심적 요소로는 감각, 표상, 연합, 상상, 사고, 의지, 감정 등을 들 수 있다. 요컨대 미의식은 이러한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미의식 가운데 심적 요소는 강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일상적 경험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미의식은 또한 실천적 태도로부터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 칸트Immanuel Kant의 소위 무관심성*은 이러한 관계에서의 미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미적 만족은 대상의 현실적 존재와는 전혀 무관한 정관적(kontemplativ)인 태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의식은 정관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며, 예술이 유희와 다른 이유도 예술은 항상 새로운 작품을 창조한다는 점에 있다. 미의식은 그 창조성과 관련하여 또한 인격성의 체험에 있는 ‘깊이’를 특성으로 한다. 표면적으로는 관조자에게 단지 불쾌를 유발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 대상도 그 미적 깊이에 있어서 소차적인 쾌감을 체험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미의식의 특성들은 미학상 주로 예술미에 대하여 고찰되고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자연미의 경우에 있어서도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