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신상

신상 神像

각 종교에 있어 신성(神性)이 인간의 모습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고, 예배의 대상이나 수호상(守護像), 봉납상(奉納像) 및 기타 제사의 대상물이 되는 조상이나 회화*.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적으로 신에 대한 계보가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주술적 제사에 사용되던 상징물을 포함한다. 따라서 구석기시대의 비너스상과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 시대에 걸쳐 시베리아, 유럽, 중동, 근동,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지모신상(地母神像)도 이에 속한다. 이 시기의 우상은 풍요나 다산의 주술적 상징일 뿐 아니라 자연이나 동물 등 불가사의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을 상징화한 것이기도 했다.
협의의 신상은 종교적 계통의 성립과 제사의 일반화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문명의 여명과 동일한 시기에 성립된다. 이집트에서 민 신, 호루스 신 등에 관한 표현은 이미 선왕조 말기에서 초기왕조시대에 시작되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는 신의 성격상 동물이나 새의 형태를 띠는 신상이 많았으며, 신성에 완전한 인간상을 부여하게 된 것은 그리스 미술*에서였다. 그리스 미술은 이른바 크소아논(xoanon)형의 조상에서 출발하여, 신성은 인격화되고 인간의 모습은 신성을 표현하는 신격과 인간상의 통일을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표현이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동서 기독교 미술에서 유일신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나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예수 등으로 형태화되었다. 특히 비잔틴*과 그 영향권 내의 미술에서는 ‘도상*(icon)’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도상적 표현은 예배상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제사의식과 밀접히 상호관련되는 문명의 성숙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상 안치실

신상 안치실 神像安置室 cella(영)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사방을 밀폐하여 신상을 안치한 가장 중요한 장소로, 규모가 큰 신전에서는 여러 개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전에서는 나오스(naos)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석기시대 미술

신석기시대 미술 新石器時代美術
Neolithic Art(영)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9000~8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석기시대의 최종단계. 촌락을 형성하고 농경과 목축, 곡물 재배가 행해진 최초의 사회이지만 미술사적으로 보면 신석기시대에는 구석기시대의 미술에 비하여 동굴벽화 같은 회화는 적고, 회화적인 부분은 채문토기의 문양이 많으며 토우(土偶)나 석우(石偶)들이 주류를 이룬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석기시대인 하스나기(기원전 5700~5300년경)부터 나타나서 유라시아 지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각지의 문명을 대표하게 된 채문토기에는 양질의 점토를 정선하여 만든 기면(器面)에 적, 백, 흑색 등의 채색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나 동물 무늬 등이 새겨진다. 하스나기에는 평행사선문, 격자문, 삼각문, 지그재그문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주를 이뤘고, 사마라기(기원전 5300~5000년경), 할라프기(기원전 5000~4300년경)에는 열점문(列点紋) 등의 문양이 첨가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동물이나 인물을 섞어 그리거나 소용돌이 또는 물결무늬 등을 혼용하면서 전체를 채색하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이집트 채문토기의 문양은 단순하고 인물이나 형상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토우와 석우는 구석기시대 후기의 유럽에 있었던 석재나 골각제 또는 토제의 인형 따위를 선구로 하는 것인데, 특히 신석기 농경문화에서는 풍요의 여신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구석기시대의 스티아트파이크스형을 연상케 하는 여성 토우가, 아나톨리아에서는 자유로운 표현의 사실적 여성 나상 토우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소박한 토우나 토수(土獸)가 있다. 하스나 문화 이후에는 구워 만든 토우나 석우가 있고 유방이 큰 여성의 좌상이나 염소, 소 등의 동물상도 있다. 이외에 유럽의 거석분(巨石墳) 벽면에 새겨진 도문(圖文)들도 신석기 미술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신선산수

신선산수 神仙山水

중국 고대의 신선 사상에 기초하여 신선의 세계를 산수화*로 그린 것. 〈영주신선도瀛州神仙圖〉〈봉래산도蓬萊山圖〉 등이 예부터 그려졌다. 환상적이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기괴하고 가파른 산봉우리를 잇달아 그리고, 화려한 누각을 배치하였으며, 학이나 거북 등 상서로운 동물을 종종 그려넣는다.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육조(六朝)시대와 당대(唐代)를 통해 성행하였으며, 송대(宋代) 이후로는 전통적인 방식인 청록산수*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소재

신소재 新素材 new materials(영)

새로운 재료나 재질을 의미. 어떤 물질이든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고가 20세기 전반에 확립되었으며, 버려진 쓰레기나 산업 재료 나아가 생명체까지 미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러한 발상은 조각*, 건축, 회화* 등 전영역에 있어 기법과 양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양한 소재의 이용은 입체주의*의 콜라주*에서 시작되어 쓸모없는 폐품들을 재료로 한 정크아트*에 이르는 앗상블라주*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되었고,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회화와 조각에 대한 종래의 구분, 즉 장르 자체의 전통적인 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신소재로는 각종 금속들과 합성수지 및 전기를 사용한 기구 등이며, 재료의 확장은 용접,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등 미술기법과 형식의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회화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신소재로는 아크릴* 물감과 플라스틱 페인트로서, 1950년대 말부터 사용되어 스테인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제작 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중반의 미술이 점차 구상적 또는 초기의 의미에서의 추상미술*에서 벗어나 개념적이거나 환경적인 작업들로 전개되면서 흙이나 동식물 같은 자연 재료들이 도입되었고, 물질, 시간, 공간과 같이 작품으로서의 확고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작품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신수

신수 神樹

성수(聖樹)라고도 한다. 3대 성수는 무우수(無憂樹), 보리수(菩提樹), 사라수(沙羅樹 혹은 沙羅雙樹)이다. 무우수는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나무 아래서 탄생하였으므로 이를 상징하여 ‘아수가수(阿輸迦樹; 아쇼카)’의 번역어로 두과(荳科)에 속하고 붉은 꽃을 피운다. 보리수는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깨달음의 상징이 된다. 뽕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본래 이름은 핍팔라 혹은 아슈바타이다. 사라수는 중인도의 쿠시나가라 부근에서 번성했던 나무로 부처님이 이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열반의 상징이 되었다.

신안파사대가

신안파사대가 新安派四大家

→ 신안화파

신안화파

신안화파 新安畵派

중국 화파의 하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점강漸江(지앤 지앙, 곧 弘仁)을 선구로, 사사표査士標(츠아 스퍄오), 손일孫逸(쑨 이), 왕지서王之瑞(우앙 즈르웨이) 등을 일컬어 ‘신안파사대가新安派四大家’라 부른다. 점강은 흡현歙縣 출신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휴녕休寧출신인데, 두 현은 모두 휘주부徽州府에 속하고, 진, 당대(晋唐代)에는 신안군新安郡에 속했으므로 그렇게 명칭이 붙었다.
또한 ‘해양사가海陽四家’라고도 불렀다. ‘해양’의 본래 명칭은 ‘휴양休陽’으로 삼국시대의 오吳에 위치했는데, 휘자(諱字)를 피해서 ‘해양’으로 고쳐 불렀다한다.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휴녕현休寧縣 동쪽 30여리 지점에 있다.
이들 사대가는 예찬倪瓚(니 짠, 1301~1374),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을 본받아서 황산黃山의 운해송석(雲海松石) 같은 경치를 많이 그리면서, 먹을 많이 쓰지 않고 붓놀림이 간결하다. 이 파의 대표적인 화가들은 정수程邃(츠엉 쑤에이), 대본효戴本孝(따이 번샤오), 정문鄭呅(즈엉 민) 등인데, 풍격은 침울하면서 고색(古色)이 창연하다.
현대의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도 이 파의 작품을 본받고 있다. 또 점강을 본받은 사람으로 강주江注(지앙 주), 오정吳定(우 띵), 요송姚宋(야오 쏭), 축창祝昌(즈우 츠앙) 등이 있어서 점강의 ‘사대제자(四大弟子)’라 불린다.

신영국미술협회

신영국미술협회 新英國美術協會
New English Art Club, NEAC(영)

보수적이고 안일한 영국왕립미술원*의 태도에 반하여 1886년 런던에서 설립된 예술가 단체. 설립자들은 대개 프랑스에서 작업하던 작가들로 특히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그리는 방식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었다. 창립회원들로는 클로젠Sir George Clausen(1852~1944), 라 탕그Herbert Henry La Thangue,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 스티어Philip Wilson Steer(1860~1942), 튜크Henry Scott Tuke가 있었으며, 1886년 4월에 말보로 화랑에서 첫번째 전람회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50여명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889년에 그룹은 1888년에 동참한 시커 Walter Richard Sicker(1860~1942)와 그의 동료들이 이끌었다. 그들은 인상주의*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1889년 <런던 인상주의자>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1897년에 시커가 물러나고 제1차세계대전 무렵까지는 브라운Frederick Brown(1945~ ), 통크스Henry Tonks(1862~1937), 스티어가 그룹을 주도했으며 이 기간에는 영국 최고의 화가 대부분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908년부터는 ‘연합예술가협회Allied Artist’s Association’와 ‘캠든타운그룹Camden Town Group’ 등 진보적인 집단에 비해 진취성이 희박해지게 되어 전후에는 아카데미*와 아방가르드* 그룹들의 중도에 위치하게 된다. 아카데미 전람회가 점차 자유로워지면서 그룹의 중요성은 감소되었으나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신인상주의

신인상주의 新印象主義
Néo-Impressionsme(프)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쇠라Georges Seurat(1859~1891)와 시냑Paul Signac(1863~1935)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 이론이자 운동.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의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아스니에르에서의 목욕Baignade à Asniéres>을 보고 비평가 페네옹Félix Fénéon이 붙인 것이다. 당시 25세였던 쇠라는 여기서 후에 이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역할을 한 시냑을 만나 ‘앙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고, 22세의 젊은 비평가 페네옹은 같은 해 이 운동을 돕기 위해 《르뷔 앙데팡당Revue Indépendante》을 창간했다.
1885년에는 시냑이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를 운동에 참가시켰으며, 크로스Henri-Edmond Cross(1856~1910), 루스Maximilien Luce, 뒤부아-피에Albert Dubois-Pillet(1845~1890) 등이 뒤를 이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고갱Paul Gaugain(1848~1903) 등도 영향을 받아 한때 신인상주의적인 작업을 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서,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純色)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된다.
사실 이런 방법은 와토Jean Antoine Watteau(1684~1721),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1798~1863),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등이 이미 사용하였다. 인상주의자 중에서는 르누아르 Auguste Renoir(1841~1919)가 최초로 실행했고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후드O.N. Hood, 쉬브렐Michel-Eugène Chevreul 등의 색 이론에 친숙하던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사용했으며 점묘주의라는 말 역시 르누아르와 모네에 관련되어 쓰이고 있었다. 따라서 신인상주의자들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점묘와 자신들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점묘를 구별하고자 하였으며 ‘분할주의Divisionnisme’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시냑은 1899년 《라 르뷔 블랑시》에 발표한 ‘외젠 들라크루와에서부터 신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에서 터치의 체계적인 분할에 의거한 분할 묘법을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분할묘법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작은 입방체들과 다를 것이 없는 단순한 점묘법*(pointillisme)과는 구별되는 것이어서 ‘분할한다는 것은 ①순수한 물감들(프리즘의 모든 색상과 모든 색조)의 시각적 혼합 ②각기 다른 요소들의 분리(고유색, 광선의 색깔 및 그 반사 등) ③각 요소들 간의 균형 및 비례(콘트라스트, 점차적인 변화 및 분산 등의 법칙에 의해) ④화폭의 크기에 알맞은 터치의 선택 등의 수단에 의해 밝은 빛, 화려한 색채 및 하모니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을 말한다.
1886년 이후 쇠라와 그의 동료들은 젊은 과학자이자 미학자인 앙리Charles Henry와 쉬브렐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했다. 앙리는 1885년 《과학적 미학 입문》에서 세련된 이론을 선보였으며, 1889년 재편집된 쉬브렐의 《동시적인 대비의 법칙에 관하여》는 이들에게 거의 교과서적인 저작이었다.
1886년 5월에 쇠라는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신인상주의의 회화적 선언인 <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출품하였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구조 안에서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고전적 전통, 고전주의*의 엄숙한 질서, 빛과 색채 그리고 형태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을 종합한 것이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표현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회화적인 여러 요소들의 과학적 배치가 정서나 정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푸생에 의해 일찍이 표명된 바 있으며, 후일 아카데미의 기본학설로 받아들여지면서 르브룅Charles Lebrun(1619~1690), 펠리비앙André Félibien des Avaux(1619~1695)에 의해 유행되었다. 색채분할 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되고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했다.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인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