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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캔버스 raw canvas(영)
밑칠*하지 않은 캔버스*. 오늘날 유화*의 기저재로서 사용되고 있는 캔버스는 판을 대신하여 15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것이다. 아마포와 목면 등으로 만들어진 화가용 캔버스는 나무틀에 매어 긴장되며 밑칠을 하여 사용되었다.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는 물감을 흡수하며 섬유가 물감에 섞는 화학제재에 의해 약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화가 루이스Morris Louis(1912~1962)는 오히려 그 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캔버스에 물감이 스며드는 역설적인 작업을 선보였으며 이후로 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효과에 주목했다.
로마 미술 Roman Art(영)
기원전 8~4세기 약 1100년 사이에 로마인들이 지배했던 지역의 미술. 이 지배지역은 도시국가로서의 로마로부터 지중해역과 서유럽 거의를 차지한 로마 제국까지 커다란 변천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8~4세기 초반(왕정시대~공화정치체제 전기)에 걸쳐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한 로마의 미술은 에트루스크 미술의 영향이 강하여 거꾸로 구분을 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로마인의 최고신 주피터Jupiter의 신전을 웨이이 출신의 우르카에게 장식시켰던 것을 두 문명간의 영향관계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이미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로부터 직접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도 증명되고 있다. 이에 뒤이은 제2포에니전쟁 종결(기원전 201)까지의 시대는 경제적 기반의 변천이라는 필연성에 근거한 영토확장 추진으로 인한 실질적인 윤리성의 확립과, 이미 충분히 발달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미술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 미술에서도 고유의 자연주의와 그리스로부터 들어온 고전주의가 병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의 로마 미술 전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과제가 되었다.
제2, 제3의 양 포에니 전쟁간의 약 반세기 동안은 로마가 동 지중해의 그리스 미술과 상접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미술가들이 로마로 이주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한 기간이었다. 그리스의 사상이 로마의 종교나 윤리관에도 영향을 미쳐 완결성을 지닌 세계관과 그 조형 표현의 고전주의가 로마 미술에 본질적으로 작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그 예로는 조상숭배를 축으로 한 초상조각이며 전통적 종교관의 변질에 반발하여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 공화정의 초상 조각이 많이 제작되었다. <카피톨리노의 브루투스상>은 이러한 맥락 속에 위치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공화정 후기는 그리스 고전미술에 대한 동경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영향이 지대하였다. 로마에서는 고전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어도 그리스인 미술가들의 활약에 의해서 헤르모도로스Hermodoros의 대리석 신전이나 티마르키데스Timarchides의 조각 등을 비롯해 수많은 고전주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로마 미술에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와 술라Lucius Cornellius Sulla, 그리고 시저Caesar의 활약은 헬레니즘 왕국의 완전 지배와 그것을 능가할 도시 로마의 건설에 이르게 되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시저의 위업을 계승하면서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와 더불어 제국관(帝國觀)의 구상으로 고전주의 미술을 채용하였다. <아라 파키스>,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 콘코르디아 신전이 제정 초기의 로마 미술 양상을 특징짓는다. 대도시로 성장한 로마를 구성하고 거기에 내재하는 다양한 요소와 가치관 중에서 본질적인 활동 기반을 상실하고 교양주의화했던 네오 아티카주의 미술이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보급되어 나갔다. 콘크리트 공법과 벽돌을 대건축에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본질적인 벽 구조에 의해 석조 건축을 전제로 하는 그리스 건축의 주식*은 그 구조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더욱 자유로운 건축 장식의 요소가 되었다. 또한 도시 건축에 있어서 방향성을 포기한 신전을 그 내부 공간에서의 종교적 분위기를 의축(擬縮)하도록 의도하였다. 장대하고 호화로운 공공건축들 중 높이를 더욱 강조하여 개선문*이나 기념 원주* 등 새로운 건축의 장르를 낳게 되었다.
헬레니즘 미술*의 개인주의와 귀족성은 로마 사회 안에서 더욱 발전하여 개인 주택의 미술관화(化)와 미술에 대한 취미의 다양화로 향하게 되었으며, 주택 내부는 벽화로 장식되고 헬레니즘 회화나 조각이 모사되었다. 그 다양성 중에서 구하게 된 공통 가치가 공예품의 기법이나 재질에도 나타나, 두들겨서 밖으로 장식이 표출되도록 세공한 금속기, 카메오 세공에 의한 장신구나 글라스, 음각에 의한 귀석 장식품 등 헬레니즘 공예를 본질적으로 계승하면서도 그 레퍼토리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아레초 토기 등을 새로 만들어 값싼 로마 글라스의 제법을 발명하는 등 일용품도 크게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을 지탱시킨 것은 도시 문명을 중심으로 한 로마 경제의 확대로서, 도시 생활자들 간의 유행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회화는 건축 내부 공간의 성격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회화 공간은 스케노그라피아에서 비롯된 ‘고대 원근법’과 ‘콤펜디아리아’로 호칭되었던 묘사법으로 표현되어 분위기나 환경과의 일치를 도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신화화도 신화적인 풍경화로 변천되었다.
조각에서도 같은 추이를 나타내어 네오 아티카 양식의 보급은 엄격 양식, 고전 양식, 헬레니즘 양식들의 조각작품에서조차 그것들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작품이 원래 갖고 있는 내용을 제거해버리고 로마 사회 내로 적응토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 작품의 모조 조각은 광대한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 보급되었다. 이 미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속에서 더욱 객관적인 표현 방법이 황제의 사적을 기념하는 역사적 부조*에 요구되었다. 공화정기의 개선화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부조의 장르는 고전주의 미술환경 안에서 초월성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자연주의를 재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미술은 도시 로마의 발전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그 발전 과정을 포메리움의 확대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새점(鳥占)을 치는 성역으로 규정되었던 포메리움은 시가구역으로 성격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동심원꼴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종교적, 사회적 측면을 지닌 도시계획이었으며 이로 인해 습지에 불과했던 캄프스 마리티우스도 포로 로마노 주변에 뒤떨어지지 않는 공공건축의 집중 지역이 되었다. 같은 전통을 갖는 동방 속주의 제도시는 로마 도시처럼 급성장에 따른 확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옛 건물의 재건으로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던 북아프리카나 서구에서는 경제상의 발전에 상응하는 계획도시가 건설되어 포룸(공공 광장)을 중심으로 한 격자꼴의 계획도시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도시 건축의 확립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 것은 네로 황제가 세운 도무스* 아우레아였다. 그 이전까지는 공공 욕장 등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돔* 건축이 궁전에도 채용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판테온에서 완성되었다. 고대 건축에 있어서는 이처럼 세속 건축의 형식과 공법이 종교 건축에 채택되는 일이 매우 드문데 이러한 적용이 이 시대에 일어났던 것은 종교와 세속 양축의 권위자로서 황제의 존재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도무스 아루레아는 밀도가 고도화된 도시 내에서 광대한 정원을 갖춘 별장 건축이었으나 고밀도화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여 네로의 사후에는 공공 욕장으로 개축되었다.
프라비우스 조 미술에 있어서 자연주의와 채색주의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더욱 견고해졌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 원주의 부조는 각선을 많이 사용한 저부조로서 거기에는 사실적인 자연주의에 의한 전쟁 묘사가 객관적 표현으로 명확히 나타나 있다. 자연주의의 대두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들어와 일시 중단상태를 맞게 된다. 그의 제국관은 특색이 있는 각 속주의 발전에 기초가 두어져서 그 독자성을 포섭한 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 공적 기념 미술에는 고전주의의 부흥이 엿보이는 반면, 속주에 대두되는 건축활동의 활성화는 동방과 북아프리카, 유럽의 각 속주에서 상이한 건축양식으로 각기 전개하게 되었다. 이 고전주의의 부흥이 단명으로 끝난 후, 2세기 후반의 안토니누스 피네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다시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자연주의가 나타나나, 객관적 사실적인 자연주의에 의한 표현과 내용 사이에는 변경(邊境)에서의 만족(蠻族) 문제와 경제적 침체에 의한 사회적 불안에 기인되는 괴리(乖離)가 생겨났다. 그때문에 자연에 존재하고 있었던 조화가 상실되고 표현요소는 과장되어서 표현주의*적 경향이 짙어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념원주 부조에서는 이미 인물상은 형태력을 잃고 서술성에 종속되어 있다. 또한 콘모두스 황제가 네로 황제의 거상을 자신의 상으로 개조한 배경에는 2세기 말의 미술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3세기 전반 세베우스조 시대의 미술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진전시키고 있으나, 그 기반에는 미트라스교를 비속해 동방 종교의 유행과 사회적 불안, 각 속주의 도시 로마에 대한 상대적인 대두가 있었다. 갈로 로망 미술의 토착적 요소의 현재화(顯在化), 북아프리카에서의 대토지 소유층이 지지한 모자이크*와 동방 속주의 바로크적 경향의 진전이 로마 미술의 큰 특징으로 되었고 도시 로마의 미술 활동은 그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스프리트(스파라툼)의 별궁은 형태가 해체된 고전성과, 그것으로 인한 거대성 지향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당시의 수많은 황제 초상의 거대성과 과장된 위엄성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 쪽에서 <성 헬레나의 석관>(336~350경)처럼 서술성으로 추상화한 단순 형태에 의한 상징화와, <루도미시의 대석관>처럼 표현 대상을 형태나 구조의 복잡화로 처리한다는 양극화를 진전시켰다. 막센티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와 같은 대건축이 건설되는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과 같이 그 부조 패널을 현재 시대의 모뉴먼트*로부터 전용(轉用)에 의지한 모뉴먼트가 출현하였다. 그로 인해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참된 창조력의 쇠퇴가 현저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미술은 그 형태 어휘를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에 전하여 그들의 표현 범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영)
대체로 650~1200년경 고딕 미술*에 앞서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했던 미술 양식. 이 시대의 건축이 고대 로마 건축의 모티브*(반원 아치*, 원주*)를 응용했음을 지적하여 프랑스의 학자 드 제르빌르de Gerville가 1820년경 이를 처음으로 ‘로망’이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로마네스크는 처음에는 건축 양식의 용어였으나 지금은 그 시대 미술 전반의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을 형성 발전케한 외적 조건은 9~10세기 서양 기독교 세계를 위협했던 이교도족(바이킹 혹은 노르만족, 이슬람교도, 마자르족 등)이 각각 싸움을 그치거나 후퇴를 하여 오토, 카페 등의 왕조가 안정됨으로써 도시나 농촌들이 재건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뛰어난 사교(司敎)와 수도사들의 지도로 인한 종교 문화운동의 발전, 특히 클뤼니회 및 시토회 등의 현저한 활약과 순례에 따른 지역적 교류의 활발화, 기술적 분야에서의 혁신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미술은 비단 고대 로마의 전통뿐만 아니라 오히려 켈트, 게르만적 전통까지도 기반으로 하여 동방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을 어느 정도 섭취, 소화해 나가면서 강력한 활력으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보급된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특히 북부 이탈리아) 등이다. 먼저 시기적으로 제일 앞선 것을 제1로마네스크라고 한다. 제1로마네스크란 원래 롬바르드 지방의 건축 양식을 일컫는 것으로서 9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하여 유럽 서남부의 여러 지역을 거쳐 독일의 라인 강과 프랑스의 론 강 유역에서 완성된 건축 양식이다. 오토만 황제 치하의 독일 예술과 함께 이 제1로마네스크 형식과 10세기말~11세기초에 프랑스에서 발달한 예술을 합해서 때로는 초기 로마네스크라고 부른다.
10세기와 11세기에 수도회가 창시되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예배를 위한 새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내려는 욕구가 로마네스크 양식을 낳게 하였다. 표현주의적 왜곡과 양식화를 보여 주는 로마네스크 구상예술에서는 자연주의*와 고전예술 또는 고딕미술이 갖는 인간적인 온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①건축:로마네스크 건축은 독일과 프랑스의 후기 카롤링 왕조의 전통과 함께, 로마의 궁륭*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롬바르드 제1로마네스크 건축이 만난 결과 생겨났다. 고대 로마의 건축 단편(斷片)을 이용하거나 또는 초기 기독교 미술* 양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고대 로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결코 로마 건축과 같은 것은 아니고, 중세기에 들어와서 점차 개명(開明)으로 향한 북유럽 및 중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스스로 육성시켜 행한 최초의 건축으로서 고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건축이다.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기까지 목조로 덮었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신랑*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점이다. 한편 화재에 강하고 건물 수명도 영구적이며 내부의 웅장함과 탁월한 음향 효과를 얻기 위해 돌로 궁륭을 만들었고, 돌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거대한 돌 벽을 쌓는 한편 측랑* 위에 계랑을 세워 이를 보강했다.
석조 궁륭은 하중이 현저하고 특히 그 기부의 하중은 비스듬히 바깥 방향으로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치게 되는 벽체는 두껍고 견고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자연 창을 넓게 열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특유의 중후한 외관과 유암(幽暗)한 내부 공간이 생겨났으며 이같은 궁륭 구조의 안정성을 어떤 방법으로 높일 수 있느냐는 점에 건축가의 노력이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궁륭을 내측으로부터 보강하기 위한 횡단 아치와 외측으로부터 보강하기 위한 부벽*이나 편개주의 발달이 돋보이며 첨두 궁륭과 교차 궁륭*의 시도와 더불어 마침내 후에 고딕 건축의 기본 구조가 되는 교차 늑재 궁륭*을 탄생시켰다. 또 외관은 토스카나파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단순 소박하고 내부는 열주*나 아케이드* 등의 건축적 효과가 어두운 공간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비종교적인 로마네스크 건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성과 성채이며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것은 영국의 런던 탑이다.
②조각:처음에는 아직 고대 후기 카롤링 왕조 미술의 영향 아래에 있었으나 12세기 말엽 스투코* 부조에서 처음으로 그와 같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다. 카롤링 왕조 및 오토 황제 시대에는 거의 소조각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이와 더불어 그 때부터 대조각이 생겨났다. 그 대부분은 돌로 된 부조*로서 건축물에 종속되어 교회 건물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건축물에 종속된 조각이기는 하지만 주두*를 보면 두개의 아치로 집약된 벽면을 기둥으로 유도하는 이 부분이 시각적으로 약점이 되기 때문에 이곳에 조각을 장식하여 형태적으로 균형을 잡고, 동시에 신랑 좌우에 죽 늘어선 주두에 여러 가지 종교적 도상*을 표현하여 신도들을 포교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일반적으로 사실미를 잃고 아르카익*의 엄격성과 때로는 경직성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건축 전반에 걸쳐 풍부한 조각 장식(프리즈*, 측벽, 주두의 식물, 동물)이 시도되었다. 주제는 전대까지와는 달리 인간상이 등장하지만, 동물, 식물, 각종 기하학 문양 등도 많다. 이밖에 건축에서 독립한 환조(금속 공예와 상아 공예 및 성당 건물을 장식한 기념물적인 조각)가 있는데, 그 도금과 착색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었다.
③회화:로마네스크의 프레스코* 및 템페라*는 카롤링과 오토만 전통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다. 비잔틴 미술*의 영향이 강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르네상스 회화로 이어지는 한편 북유럽에서는 고딕으로 발전했다. 건축의 내부 벽면은 오직 벽화*로 장식되며 모자이크*는 마룻바닥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았다. 베네딕트 수도회*, 클뤼니회 등의 수도회에서 벽면을 성상화로 꾸미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양식은 지역에 따라 변화가 있고 비잔틴의 영향도 받았으나 전반적으로는 사실에 구애되지 않고 강한 색채와 힘있는 묘선을 구사하여 형태에 있어서 강렬한 표현력을 주고 있다. 한편 유리창도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해 성상을 표현한 경우가 많다. 소예술로는 필사본삽화가 발달했으며 그 예가 풍부하다. 그들 대부분은 수도원 사본제작소에서 그려졌다.
회화로서는 카탈루냐에서 특이한 발달을 이룬 제단화*, 이탈리아의 십자가화 등이 있으며 에마유는 라인 지역 및 서남 프랑스 등지에서 11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12세기 후반의 모장파, 12~13세기의 리무장파 등 모두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며 성서의 장정과 십자가, 성유물상자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마네스크의 조각과 회화에서의 형태표현은 자연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의 이해, 기능성의 존중, 강한 표현력 혹은 깊은 종교성을 그 특색으로 한다.
로스트 스컬프처 lost sculpture(영)
‘보이지 않는 조각’이라고도 한다. ‘잃어버린(lost)’이라는 말은 발견된 오브제*의 ‘발견된(found)’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코즐로프Max Kozloff를 비롯한 사람들이 저드Donald Judd(1928~1994), 안드레Carl André(1935~ ) 및 모리스Robert Morris(1931~ )의 미니멀 아트*에 붙인 다른 이름이다. 그들의 조각은 거의 시각적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 자칫 사실적이고 특징없는 일상용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71년 아른헴에서 <손스빅Sonsbeek> 3주기전에 전시되었던 안드레의 작품 중 하나는 공원 관리인이 쓰레기로 잘못 알고 치워버렸다는 실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로스트럼 rostrum(영)
고대 로마 ‘포룸 로마눔(포로 로마노)’의 원로원 의원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 사이에 있었던 연단(演壇) 또는 설교 단상으로서 현재는 기초 바닥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라틴어로 ‘병선(兵船)의 뱃부리’라는 뜻으로 원래는 고대 군함에서 적군의 배를 깨기 위해 뱃머리에 새 부리형으로 돌출시킨 부분을 가리킨다. 기원전 338년 로마의 원형 경기장 안의 연단을 전리품인 뱃부리로 장식한 것에서 유래하였으나, 뜻이 바뀌어 광장이나 공회당 등의 연단을 말하게 되었다.
로케쉬바라 Lokeshvara(범)
캄보디아에서 관음Avalokiteshvara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말이다. 이 용어는 791년에 쓰여진 비문에 ‘로케쉬바라보살상(bodhisattva Lokeshvara)을 세운다’는 것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지만 화불*이 표현된 대승 불교의 관음보살상은 이미 7세기부터 나타난다. 그 후 13세기 전반까지 이 상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 시대(재위 1181~1220)의 작품이 많다.
초기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은 하나의 얼굴에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일면다비(一面多臂)의 밀교적인 형태로 표현되었으나 다면다비 상도 제작되었다. 대체로 입상(立像) 형식인 이 상들은 돌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앙코르 톰의 성문이나 바욘 사원에 보이는 인면탑*의 얼굴이 바로 로케쉬바라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로코코 미술 Rococo Art(영)
미술사에서 루이 15세 시대에 유행했던 특징적인 장식예술 및 장식품들을 일컫는 용어.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 양식에 이어 1700년경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18세기말 복고풍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유럽을 휩쓸었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약돌’을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단어는 루이 15세 치하의 상류 사회의 취향을 지칭하는 미술사가들의 은어이다. 처음에는 조롱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나, 요즈음에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일과 조화를 갖고 있는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일컫는 데 사용된다. 직선을 싫어하고 휘어지거나 구부러진, 정교한 장식을 애호하는 점에서는 바로크와 공통되나, 힘찬 후자에 비해서 로코코는 오히려 우아, 경쾌하고, S자형의 곡선, 비대칭적인 장식, 이국적인 풍취, 중국 풍취가 두드러진다.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유동적인 조형 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 의지적임에 반하여 로코코는 여성적,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축에서는 이탈리아의 유바라Filippo Juvara(1676~1736)와 그 선배 건축가들의 조소(彫塑)적인 바로크 양식이 각국의 전통을 통해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프랑스의 새로운 장식법을 도입하여 살아나게 하였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의 작품은 로베르 드 코브의 베르사유 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Juste Aurèle Meissonier(1815~1891)와 보프랑Gabriel-Germain Boffrand에 의해 완성되었다. 보프랑이 만든 오텔 드 쉬비즈의 타원형 살롱, 가브리엘의 퐁텐블로 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유 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조각에서는 17세기 베르니니Bernini(1598~1680)의 동적인 바로크 미술 대신에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Jean Antoine Watteau(1684~1721)의 <시테르 섬으로의 여행>(1717)에서 비롯되는데, 그는 색과 선이 서로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을 보이면서 품위있는 궁정 남녀의 유희도 등의 걸작을 남겼다.
1730~1735년 로코코의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된다. 훗날 ‘회화적 장르(genre pittoresque)’라 불리는 이 시기의 특징은 비대칭적인 장식의 사용이다. 이것은 피노Nicolas Pineau가 실내 장식에서, 메소니에가 은공예에서 처음 시도하였으며, 그 후 조각가이자 보석세공인인 몽돈Jean Mondon과 조각가인 드 퀴빌리에Jean François de Cuvillies가 그 뒤를 이었다.
로코코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와토와 부셰François Boucher(1703~1770)가 있다. 프랑스에서의 로코코의 퇴조는 신고전주의*의 부활에 선행되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에 코겡Charles Nicolas Cochin과 블롱댕Jacques-François Blondin은 ‘회화적 장르’의 극단적인 사치에서 돌아서 고전적 풍습의 모방이 아닌 이전 세기의 좋은 취향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로코코는 고대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새로운 취향의 고전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로터스 기둥 lotus column(영)
고대 이집트의 장식기둥의 한 종류로 연꽃무늬 모양으로 꾸민 기둥. 봉우리 또는 꽃모양의 주두*와 연꽃의 둥근 단면의 줄기를 4~6가닥으로 모양을 낸 주신(柱身, shaft)으로 구성되었다. 주두 바로 밑은 끈으로 3~5번 둘렀다. 봉우리형 주두의 로터스 기둥은 제5왕조(기원전 2494~2445)에서 비롯되어 중왕국시대(기원전 2050~1786경)에도 사용되었으나, 신왕국시대(기원전 1567~1085경) 이후로는 극도로 양식화되어 파피루스 기둥*과 구별이 곤란한 것도 생겼다.
로톤다 rotonda(이)
라틴어의 ‘rotundus(원형의)’에서 파생된 말로 원형 건축을 가리키며, 둥그런 평면구조를 가지며 주로 윗부분이 돔*으로 되어있는 독립적 건물, 또는 큰 건축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방이다. 로마의 판테온이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