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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영)

대체로 650~1200년경 고딕 미술*에 앞서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했던 미술 양식. 이 시대의 건축이 고대 로마 건축의 모티브*(반원 아치*, 원주*)를 응용했음을 지적하여 프랑스의 학자 드 제르빌르de Gerville가 1820년경 이를 처음으로 ‘로망’이라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로마네스크는 처음에는 건축 양식의 용어였으나 지금은 그 시대 미술 전반의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을 형성 발전케한 외적 조건은 9~10세기 서양 기독교 세계를 위협했던 이교도족(바이킹 혹은 노르만족, 이슬람교도, 마자르족 등)이 각각 싸움을 그치거나 후퇴를 하여 오토, 카페 등의 왕조가 안정됨으로써 도시나 농촌들이 재건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뛰어난 사교(司敎)와 수도사들의 지도로 인한 종교 문화운동의 발전, 특히 클뤼니회 및 시토회 등의 현저한 활약과 순례에 따른 지역적 교류의 활발화, 기술적 분야에서의 혁신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미술은 비단 고대 로마의 전통뿐만 아니라 오히려 켈트, 게르만적 전통까지도 기반으로 하여 동방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을 어느 정도 섭취, 소화해 나가면서 강력한 활력으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보급된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특히 북부 이탈리아) 등이다. 먼저 시기적으로 제일 앞선 것을 제1로마네스크라고 한다. 제1로마네스크란 원래 롬바르드 지방의 건축 양식을 일컫는 것으로서 9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시작하여 유럽 서남부의 여러 지역을 거쳐 독일의 라인 강과 프랑스의 론 강 유역에서 완성된 건축 양식이다. 오토만 황제 치하의 독일 예술과 함께 이 제1로마네스크 형식과 10세기말~11세기초에 프랑스에서 발달한 예술을 합해서 때로는 초기 로마네스크라고 부른다.
10세기와 11세기에 수도회가 창시되어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예배를 위한 새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내려는 욕구가 로마네스크 양식을 낳게 하였다. 표현주의적 왜곡과 양식화를 보여 주는 로마네스크 구상예술에서는 자연주의*와 고전예술 또는 고딕미술이 갖는 인간적인 온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①건축:로마네스크 건축은 독일과 프랑스의 후기 카롤링 왕조의 전통과 함께, 로마의 궁륭*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롬바르드 제1로마네스크 건축이 만난 결과 생겨났다. 고대 로마의 건축 단편(斷片)을 이용하거나 또는 초기 기독교 미술* 양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고대 로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결코 로마 건축과 같은 것은 아니고, 중세기에 들어와서 점차 개명(開明)으로 향한 북유럽 및 중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스스로 육성시켜 행한 최초의 건축으로서 고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건축이다.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기까지 목조로 덮었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신랑*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점이다. 한편 화재에 강하고 건물 수명도 영구적이며 내부의 웅장함과 탁월한 음향 효과를 얻기 위해 돌로 궁륭을 만들었고, 돌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거대한 돌 벽을 쌓는 한편 측랑* 위에 계랑을 세워 이를 보강했다.
석조 궁륭은 하중이 현저하고 특히 그 기부의 하중은 비스듬히 바깥 방향으로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치게 되는 벽체는 두껍고 견고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자연 창을 넓게 열지 못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특유의 중후한 외관과 유암(幽暗)한 내부 공간이 생겨났으며 이같은 궁륭 구조의 안정성을 어떤 방법으로 높일 수 있느냐는 점에 건축가의 노력이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궁륭을 내측으로부터 보강하기 위한 횡단 아치와 외측으로부터 보강하기 위한 부벽*이나 편개주의 발달이 돋보이며 첨두 궁륭과 교차 궁륭*의 시도와 더불어 마침내 후에 고딕 건축의 기본 구조가 되는 교차 늑재 궁륭*을 탄생시켰다. 또 외관은 토스카나파 등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단순 소박하고 내부는 열주*나 아케이드* 등의 건축적 효과가 어두운 공간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비종교적인 로마네스크 건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성과 성채이며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것은 영국의 런던 탑이다.
②조각:처음에는 아직 고대 후기 카롤링 왕조 미술의 영향 아래에 있었으나 12세기 말엽 스투코* 부조에서 처음으로 그와 같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다. 카롤링 왕조 및 오토 황제 시대에는 거의 소조각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이와 더불어 그 때부터 대조각이 생겨났다. 그 대부분은 돌로 된 부조*로서 건축물에 종속되어 교회 건물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건축물에 종속된 조각이기는 하지만 주두*를 보면 두개의 아치로 집약된 벽면을 기둥으로 유도하는 이 부분이 시각적으로 약점이 되기 때문에 이곳에 조각을 장식하여 형태적으로 균형을 잡고, 동시에 신랑 좌우에 죽 늘어선 주두에 여러 가지 종교적 도상*을 표현하여 신도들을 포교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일반적으로 사실미를 잃고 아르카익*의 엄격성과 때로는 경직성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건축 전반에 걸쳐 풍부한 조각 장식(프리즈*, 측벽, 주두의 식물, 동물)이 시도되었다. 주제는 전대까지와는 달리 인간상이 등장하지만, 동물, 식물, 각종 기하학 문양 등도 많다. 이밖에 건축에서 독립한 환조(금속 공예와 상아 공예 및 성당 건물을 장식한 기념물적인 조각)가 있는데, 그 도금과 착색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었다.
③회화:로마네스크의 프레스코* 및 템페라*는 카롤링과 오토만 전통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다. 비잔틴 미술*의 영향이 강했던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르네상스 회화로 이어지는 한편 북유럽에서는 고딕으로 발전했다. 건축의 내부 벽면은 오직 벽화*로 장식되며 모자이크*는 마룻바닥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았다. 베네딕트 수도회*, 클뤼니회 등의 수도회에서 벽면을 성상화로 꾸미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양식은 지역에 따라 변화가 있고 비잔틴의 영향도 받았으나 전반적으로는 사실에 구애되지 않고 강한 색채와 힘있는 묘선을 구사하여 형태에 있어서 강렬한 표현력을 주고 있다. 한편 유리창도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해 성상을 표현한 경우가 많다. 소예술로는 필사본삽화가 발달했으며 그 예가 풍부하다. 그들 대부분은 수도원 사본제작소에서 그려졌다.
회화로서는 카탈루냐에서 특이한 발달을 이룬 제단화*, 이탈리아의 십자가화 등이 있으며 에마유는 라인 지역 및 서남 프랑스 등지에서 11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12세기 후반의 모장파, 12~13세기의 리무장파 등 모두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며 성서의 장정과 십자가, 성유물상자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마네스크의 조각과 회화에서의 형태표현은 자연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의 이해, 기능성의 존중, 강한 표현력 혹은 깊은 종교성을 그 특색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