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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파괴주의

성상파괴주의 聖象破壞主義
iconoclasm(영)

종교적인 이유에서 종교적인 우상이나 형상을 파괴하는 것. 보다 넓게는 동기와 상관없이 이미지의 재현*을 억제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성상파괴주의에 관한 연구는 종교적 교리와 관련해서 자연과 형상의 가치에 관한 논의들을 낳았다. 성상 파괴에 관한 역사적으로 특별한 논쟁은 로마 교황과 비잔틴의 대립 가운데에서 비롯되었다. 8세기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아랍군을 격퇴한 이사우리아조의 황제 레오 3세는 726년에 로마와 이탈리아의 일부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그 파괴 및 몰수를 명했다.
단지 종교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윤리 등 문화 전반과 관련된 이 조치는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의 우상 숭배 경향을 근절시킴과 동시에 포교의 편의상 전통적으로 성상 숭배에 호의적이었던 수도사의 정치적 영향력을 억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와 이탈리아내 비잔틴 속주민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유형의 표현으로서 신성한 것을 숭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성상을 수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전통에 호소하고, 특히 거칠고 무지한 대중을 기독교에 접근시키기 위한 유일하고 효과적인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성상 파괴 논쟁은 테오도라가 레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성상 파괴 행위를 무효화시키고 그리스 정교(正敎)를 부흥하려고 한 843년까지 계속되었다. 성상 파괴 논쟁을 하나의 계기로 비잔틴 제국은 로마, 게르만 세계로부터 점차 더 분리되어 그리스, 아시아적인 국가로 변해갔다.
격렬하던 분쟁은 여제 이레네에 의해 중단되어 787~813년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었으나, 이후의 국면에서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화되었다. 즉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에 대한 견해 차이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로마 교황과 비잔틴 황제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교황을 프랑크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한 것이다. 결국 1054년에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