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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냅사진 미학

스냅사진 미학 snapshot aesthetics(영)

20세기 사진은 보도사진*이거나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찍은 스냅사진이 주류를 이룬다. 아마추어 스냅사진은 자의적인 요소나 복잡한 기교가 가장 적게 사용된 사진기법으로, 사진은 어떠해야 한다는 통념이나 사진기의 성능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일정한 관례에 따른다.
대부분의 스냅사진은 자연광 아래에서 주제를 중앙에 배치하는 방식을 따르며, 작은 인화지와 흑백필름을 선호한다. 스냅사진에서는 종종 그 비계획성과 순간적인 장면의 포착으로 인하여 종종 기교가 뛰어난 전문 사진작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이와 인간미가 나타나기도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소박하지만 표현력이 강한 스냅사진은 예술사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스냅사진 미학’의 주창자는 프랭크Robert Frank로 그는 1959년 《미국인》이란 흑백사진집을 출간했다. 프랭크의 이 책은 세속적인 주제 뿐 아니라 비교적 솔직한 사진양식을 보여준 것으로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다. 스냅사진미학은 아담스Ansel Adams(1902~1984),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 웨스턴Edward Weston(1886~1968) 및 그외 정통 사진* 주창자들이 표방한 격조높고 신비스러운 사진작품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메라에 주로 의거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은 정통 사진의 한 지류(支流)로 볼 수 있다.

→ ‘정통 사진’ 참조

스리랑카 미술

스리랑카 미술 Sri Lankan Art(영)

스리랑카의 싱할리즈Singhalese 왕조는 기원전 5세기에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보다 분명한 역사는 데바남피야-티사왕Devānampiya Tissa이 즉위한 기원전 247년부터이다. 이 왕의 재위 중에 아쇼카왕Aśoka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기원전 3세기경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이래 스리랑카의 건축과 조각*은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특히 인도 동쪽 해안지방에 있던 안드라* 왕조의 미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의 수도는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였으나 8세기경 남인도의 타밀인들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옮겼다. 그러나 폴론나루와도 15세기경 타밀인들에게 함락되었다. 스리랑카의 사서(史書)인 《마하밤사Māhavamsa》와 《출라밤사Cūlavamsa》는 사원 건축 방법과 사당의 봉헌 의식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스리랑카 미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누라다푸라 지역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스투파*인 다가바*이다. 투파라마Thūpārāma 다가바는 기원전 3세기경에 봉헌된 스투파이고 루완벨리Ruvanveli 다가바는 기원전 1세기경까지 올라가는 고탑이지만 후세에 복원된 것이어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스리랑카의 불교 사당들은 비하라*(vihāra)라고 부르는데 대형 다가바들 옆에는 이러한 비하라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장방형인 건물의 내부에는 지붕을 받치는 열주*가 늘어서 있다. 이 기둥들은 방형이나 팔각형인데 목 아랫부분에는 사자 머리가 있고 그 위에는 연화 주두* 및 동물들의 띠가 올려져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기원전 1세기경 조영된 로하파사다Lohapāsāda(놋쇠 궁전)는 현재 기초부만 남아있으나 1,600여 개의 기둥을 세워서 지은 매우 큰 건축물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일반적으로 불교부파의 하나인 상좌부(上座部)이지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인디카투사야Indikatusaya 다가바에서 반야(般若)의 게송(偈頌)이 새겨진 동판이 발견되어 스리랑카에도 대승 불교가 들어왔었음을 알 수 있다.
싱할리즈 건축이 아마라바티*의 후기 안드라 건축과 연관성이 있듯이 2~3세기에 만들어졌던 조각에서도 이러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루완벨리 다가바의 기단부 둘레에 세워져 있던 석조 불입상 2구와 보살입상 1구는 후기 안드라 왕조* 시대의 아마라바티 불상 형식을 변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누라다푸라의 초기 조각에서는 드바라팔라(문지기) 부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뱀신인 나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세장한 비례는 아마라바티의 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누라다푸라의 사당 입구에는 반원형 모양의 ‘문 스톤(moon stone)’(반월석)이 깔려 있다. 이 돌에는 네 방위를 상징하는 동물들인 사자, 코끼리, 말, 황소 및 거위 등이 새겨져 있다.
8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수루무니Isurumuni 비하라의 마애부조는 팔라바* 시대의 조각과 매우 유사하다. 시기리야Sīgiriya 석굴의 벽화는 6세기경의 그림으로서 아마라바티 부조에 나오는 여인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781년 수도를 스리랑카 동북부의 폴론나루와로 옮겼는데, 이 지역에서의 조형 활동은 파라크라마바후Parākramabāhu 1세(재위 1164~1197)의 치세 기간이 전성기였다.
갈Gal 비하라에는 약 15m 길이의 불열반상이 있는데 아누라다푸라의 불입상처럼 옷주름을 반복적인 평행 융기선으로 표현했다. 열반상의 머리 옆에는 7.5m 높이의 아난(阿難)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후대의 건축물 중에는 니상카 말라왕Nissanka Malla의 재위시(1198~1207)에 만들어진 사당과 비하라들이 주목할 만하다. 피라미드 모양의 사당인 사트 마할 파사다Sat Mahal Pāsāda, 달라다게Daladāgē(불치佛齒 사당), 와타다게Vatadāgē(원형 불치 사당) 등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폴론나루와 북쪽에는 촐라 왕조*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북방 사원이 있는데 성소의 내벽에는 훼손이 심한 본생도*들이 장식되어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6~8세기(혹은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황동 파티니 데비Pattinī Devī상이 소장되어 있다

스완칼로크

스완칼로크 swankalok(타)

14~15세기에 많이 만들어진 타이*의 도자기로 메남강 중류에 인접한 스완칼로크 가마*(窯)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타이의 도자기 제작은 13세기경 중국 도공으로부터 도기 제작법을 배워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수코타이 지방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철회(鐵繪)도기, 청자*(靑磁), 흑이유(黑飴釉)를 칠한 것, 실투성(失透性)의 백탁유(白濁釉)를 칠한 것 등이 있다.
도자기의 종류로는 평발(平鉢)이 많고 항아리(壺), 물주전자, 쌍이병(雙耳甁), 술잔 등도 있다. 15세기 중엽 스완칼로크의 도공들은 쳉마이로 이주하여 철유(鐵釉)와 철회 도기를 만들었으나 16세기 중엽부터 점차 쇠퇴했다. 타이의 도자기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에까지 널리 수출되었다. 모모야마 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이 도자기를 ‘순코로쿠(宋胡錄)’라고 불렀다.

스케치

스케치 sketch(영)

일반적으로 미술가들이 본격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예비적인 착상을 기록해두기 위해 그리는 대략적인 밑그림 혹은 대상물을 신속하게 묘사하는 습작. 단순히 약화(略畵)라고도 하는 스케치의 개념은 르네상스기에 확립되었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에튀드*와는 개념상 구별하여 사용한다.
한편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소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통적인 밑그림용 스케치는 대체로 전체 구도와 배치에 역점을 둔다. 이것은 주로 미술가의 작업지침으로 사용되지만,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나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같이 많은 조수들을 고용하여 함께 작업하는 공방*의 경우에는 스승이 조수들에게 작업을 지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스케치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번째는 크로키*로서 작가가 보고 기록해두고 싶은 정경이나 사건을 재빨리 그린 것이다. 두번째는 일반적으로 색채를 사용하여 풍경의 분위기와 전체적인 인상을 기록하는 포샤드이다. 세번째로는 초상화*와 관련되어 모델이 될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이나 신체적 특징을 표시해두기 위한 스케치가 있다. 18세기 이후에 스케치는 이러한 전통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펜이나 연필같은 간단한 매체를 이용하여 시각적 경험을 그리는 가볍고 즉흥적이며 그 자체로서 완결된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을 선호하는 낭만주의*적 태도와 자연예찬, 여행수단의 발달, 아마추어 미술인의 증가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작품을 위한 예비 단계나 습작 정도로 인식되었던 과거의 스케치 작품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스퀸치

스퀸치 squinch(영)

건축 용어. 펜던티브*와 함께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만들어 놓는 방법. 첨탑이나 돔과 같은 상부구조를 지지하기 위하여 정방형의 각 모퉁이를 가로질러 만든 작은 아치* 또는 까치발 등의 장치이다. 이 모서리를 가로지르는 작은 아치의 꼭대기에 돔의 원형 밑면이 세워지는데, 각 스퀸치는 아랫부분보다 직경이 점점 더 커지며 돔의 발단부는 팔각형의 모양이 된다. 고대 로마에서도 볼 수 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스키타이 미술

스키타이 미술 Scythian Art(영)

기원전 7~3세기 사이 흑해 북쪽 연안에 거주하던 이란계 종족인 스키타이의 조형예술*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기원전 1000년경 북방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의 미술도 포함된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인 쿠르간(kurgan)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 스키타이 미술을 대표한다. 부장품은 기원전 7~5세기까지의 전기와 기원전 4~3세기까지의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의 미술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후기의 미술은 그리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전기의 중요한 쿠르간으로는 리트이, 코스트롬스카야, 올리스키이 등이 있고, 후기의 예로는 솔로카, 쿨 오바 등이 있다. 금, 은, 청동으로 만든 독자적인 동물의장(動物意匠)의 공예품이 스키타이의 중요한 미술품이다. 후기에는 금세공을 위주로 하는 호화롭고 섬세한 작품이 많은데, 대부분은 흑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세공 기술을 습득한 스키타이인들이 만든 작품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 미술은 흑해 북쪽 연안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몽골에 이르는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졌으며 약간의 지역적인 차이는 있으나 북방 유라시아 지역의 보편적인 유목 미술을 형성하였다.

스타일

스타일 style(영)

→ 양식

스타일러스

스타일러스 stylus(영)

→ 철필

스태빌

스태빌 stabile(영)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가 1930년대 말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정지된 조각(immobile sculpture)’의 총칭으로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과 대조적인 개념이다. 그 명칭은 1932년 파리의 비뇽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칼더가 모빌을 발표했을 때, 이것을 본 아르프Jean Arp(1887~1966)가 이전의 움직이지 않는 칼더의 철사 조각 작품을 보고 ‘스태빌’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이후 강철로 제작된 기념비적 추상 조각들도 스태빌에 포함되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가벼운 모빌에 비해, 육중한 구조의 스태빌은 대지의 중력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1950년대 이후 거대한 스태빌 작품들은 도심이나 공원, 광장, 고층건물에 자리잡으면서 대표적인 공공 조각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1960년대에 제작된 것 중에는 사람이 걸어다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대규모적인 작품이 많고, 스태빌은 개방적인 옥외 환경 속에 설치되어 고층 건축물과도 조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도시 미관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 ‘모빌’ 참조

스테인 페인팅

스테인 페인팅 stain painting(영)

색면 회화*에 속하는 스테인 페인팅은 캔버스 위에 붓을 사용해 물감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처리 즉 초벌질이 되지 않은 캔버스에 물감(주로 희석된 아크릴 도료)을 직접 부어버림으로써 얼룩지거나 스며들도록 하는 회화이다.
대개의 경우 얼룩회화는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 대신 바닥에 펼쳐 놓은 채 제작된다. 얼룩회화 기법은 1952년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의 드리핑* 페인팅에서 영향을 받은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1928~ )가 시작하였으며, 1953년 4월 그의 작품 <산과 바다>를 본 루이스Morris Louis(1912~1962)가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의 양식을 변화시켜 새로운 스테인 회화에 몰두하게 되면서 확산되었다.
평론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1909~1994)는 그의 변화에 대해 “색채와 바탕과의 밀접한 일치감을 얻어내는 방법은 기름에 수채화 물감의 기법을 차용하여 흡수력 있는 표면에 안료를 얇게 펴바르는 것이다. 루이스는 크기가 정해지지 않고 바탕칠이 안된 두꺼운 목면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려 안료가 아주 얇게 모든 부분에 퍼지게 한다. 그리고 그 색채의 막이 아무리 많다 해도 밑에 있는 섬유의 짜임새가 드러나도록 가볍게 부착시킨다. 이 경우 섬유는 단순히 물감으로 덮였다기 보다 그것이 스며들어 젖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료 그 자체, 색 그 자체가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실제 루이스의 스테인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작품과는 아주 다른 물질적 효과를 발산하며, 그 채색과정은 색채의 형태와 명암에 대한 반동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작품은 색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나아가 폴록이 입체주의*에서 물려받은 얇은 공간을 벗어나는 동시에 뉴만Barnet Newman(1905~1970)과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의 희미한 상징적 공간에 비해서도 훨씬 실재적인 ‘평면성’을 성취할 수 있었다. 표면처리가 되지 않은 캔버스는 겹치거나 주름이 잡혀 다양한 구성을 창출하였으며, 완성 단계에 이르러 주름이 펴지게 되는데, 이것은 화가들에게 있어 위치 안배의 문제, 즉 화면 이미지와 액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희석된 아크릴 도료는 천 속으로 스며들어 자체의 색이 겉으로 보기에 실체가 없는 것처럼 드러나게 함으로써 도료의 질감이나 광택은 느껴지지 않는다.
스테인 페인팅은 상당히 자동기술적인 제작 양상을 띤다. 미국의 비평가들이 지적한 스테인 페인팅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손이나 팔의 움직임이 전혀 개입되지 않음으로써 화가는 전통적으로 붓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그림의 선이 함축하는 속성으로부터 해방된다. 안료의 얼룩진 부위는 순수한 색채로 존재하고 색조의 변화를 기하는 문제는 초월된다. 스테인 페인팅은 제작과정이 그대로 기록되는 회화이며 따라서 회화의 구조와 제작과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스테인 페인팅의 미를 ‘결함을 감추는 화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로젠버그Herold Rosenberg(1906~1978)는 스테인 페인팅의 색채 흡수성을 비판하면서 여기에서 청결함과 편안함이라는 중산층의 가치가 확인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