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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Bauhaus(독)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바이마르에 설립한 건축, 공예, 디자인 등의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가의 집’이라는 뜻이며 건축을 주축으로 하여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다. ‘종합 예술(Gesamtkunst)’ 개념을 통하여 각 예술 영역 간의 상호교류를 강조하였고, 미술과 기술의 종합을 통해 현대 예술을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 클레Paul Klee(1879~1940), 이텐Johannes Itten(1888~1967), 앨버스Josef Albers(1888~1976), 슐레머Oskar Schlemmer(1889~1943),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 교수진이 여러 분야에 걸쳐 망라되어 있었으며 인재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학위를 얻으려면 6개월간의 예비 과정을 거친 다음, 특정 공예 분야에서 3년의 도제 훈련을 받고 건축 분야에서 일정 기간의 연구를 마쳐야 했다.
바우하우스 교육은 이론과 실제를 병행함으로써 일상생활의 기능성과 밀착된 합리적이고 유용한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는 기계에 의거한 대량 생산을 적극적으로 고취함으로써 숙련된 기술의 디자인을 근대 산업 기술과 조화시키려 시도하였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기능주의*의 개념이 부활하였다. 즉 모든 창조는 유용해야 하며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로피우스에 이어 교장이 된 마이어Hannes Meyer(1889~1954)는 산업과 미술의 결합에 한층 역점을 두어 기능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바우하우스의 조형감각을 경고하면서 바우하우스는 예술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며 디자이너의 창조적 활동은 사회와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후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가 교장으로 역임하였으나, 주(州)정부의 압력을 받아 1932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3년 나치에 의해 ‘문화 볼셰비즘의 소굴’로 간주되면서 완전 폐쇄되었고, 바우하우스의 멤버들은 파리와 런던, 미국 등지로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의 사상을 세계적으로 퍼뜨렸다. 한 예로 그로피우스는 1937년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다. 1920년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바우하우스는 국제적 양식 창출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