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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

사군자 四君子

동양 화훼도*의 한 화제(畵題).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군자에 비교해서 그린 그림으로 문인화*의 영역에 속한다. 매화는 겨울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인해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난초는 담백한 색과 은은한 향기로 인해 군자의 고결함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또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워 군자의 은일자적함에 비유되었으며,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 때문에 군자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기상으로 여겨져 왔다.
원래 사군자는 화조화*의 일부로서 취급되었으나, 그 상징성으로 인해 북송北宋 때부터 문인들이 즐겨 그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의 독립된 화목으로 정립되었다. 묵죽(墨竹)을 사대부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소식蘇軾(쑤 스, 1306~1101)과 문동文同(원 통)이며, 묵매화(墨梅花)는 화광중인華光仲仁(화구앙 쭝르언)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이들은 ‘흉중성죽(胸中成竹)’이라는 문인화론을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뒷받침했다. 처음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졌으나 북송 이후부터는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주로 먹을 사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려졌다. 원대(元代)에는 몽골족에게 나라를 잃은 한족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지조와 저항의 표현으로 자주 그려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鄭思肖(즈엉 쓰차오)의 난초그림으로, 뿌리없는 난초를 그려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명明의 신종神宗 만력 연간(萬曆, 1573~1619)에 황봉지黃鳳池(후앙 펑즈)가 《매죽란국사보梅竹蘭菊四譜》를 편집했고, 문인 진계유陳繼儒(츠언 지로우)는 ‘사군’이라 불렀는데, 후에 ‘사군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군자’라는 명칭은 명대(明代)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대(淸代)의 왕개王槪(우앙 까이)가 편집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제3집은 바로 매난국죽에 관한 사보(四譜)이다. 청대의 정섭鄭燮(즈엉 시에)이 사군자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송宋, 원元 회화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이 묵죽, 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대부들은 물론 화원(畵員)들도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독자적인 양식이 선보였고, 후기에 들어오면 남종화*(南宗畵)의 유행으로 더욱 많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