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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 누보

아르 누보 Art Nouveau(프)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서유럽 전역 및 미국에까지 넓게 퍼졌던 장식적 양식. 아르 누보라는 명칭은 1895년 파리에서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가 내부 장식한 빙Siegfried Bing의 공예품점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같은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모던 스타일(Modern style, 영), 유겐트슈틸*(Jugendstil, 독, 오),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 이), 귀마르 양식(Guimard Style, 프) 등 나라마다 다양하다.
아르 누보의 탄생은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중세적인 수공예 정신의 복귀를 선언했던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의 미술과 공예운동*, 빅토리아 시대의 인습에 반항하고 초기 르네상스의 우아함과 색채를 재생하려 했던 라파엘전파*, 아카데미*에 순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신비하고 계시적인 태도로 작업했던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 등이 그 기원이다.
19세기 후반에 유행처럼 번졌던 아카데믹하고 절충주의적인 ‘역사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아르 누보 운동은 과거의 전통 양식들을 모방하거나 변형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자 했다. 종래의 건축이나 공예가 그 전형을 그리스, 로마 혹은 고딕으로부터 구한 것에 비해 아르 누보 작가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특히 덩굴손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판상, 당초, 화염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과 유기적인 움직임이 있는 모티브를 즐겨 사용했으며, 고전적인 좌우대칭이나 엄격한 구성은 배제하였다.
아르 누보 양식은 당시 상징주의*와 나비파*, 뭉크Edvard Munch(1851~1944),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등의 미술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선호로 인해 견고한 구축성이나 기능을 다소 소홀히 하는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장식으로 빠질 위험이 있었으며 이는 아르 누보가 비교적 단명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아르 누보의 전성기는 1895년경부터 약 10년 동안이다. 1880년대에는 영국의 맥머도Arthur Heygate Mackmurdo(1851~1942), 미국의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1856~1934), 스페인의 가우디Antoni Gaudí y Cornet(1852~1926) 등이 디자인이나 건축에서 곡선적인 형태를 많이 사용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의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1868~1928), 비어즐리Vincent Aubrey Beardsley(1872~1898), 벨기에의 반 데 벨데와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프랑스의 가이야르Eugène Gaillard 와 파리 지하철 역으로 유명한 귀마르Hector Guimard(1867~1942), 독일의 에크만Otto Eckmann,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 등이 그래픽 디자인, 공예, 건축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아르누보는 급속히 보급되었다.
‘아르 누보 관(館)’으로서 빙의 상점이 유명해진 것도 양식의 유행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7년 드레스덴 박람회, 1902년 트리노 박람회 등에서는 아르 누보의 실내장식과 가구 등 공예품 전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896년에는 뮌헨에서 《유겐트Jugend》지가 발간되면서 독일의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 운동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경부터 점차 건축과 공예의 기능과 사회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라리크René Lalique의 보석 디자인, 갈레Éile Gallé의 유리공예, 미국 티파니의 공예품, 가우디의 건축 활동 등을 제외하고는 아르 누보 양식은 점차 약화돼 갔다.
훗날 장식 과잉의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세기말적 악취미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 아르 누보는 최근 들어 재평가되고 있다. 빈 분리파*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장식적, 상징적 표현을 고취함으로써 반인상주의적인 현대에 이르는 디딤돌이 되었으며, 특히 아르 누보의 세례를 받았던 고갱Paul Gaugain(1848~1903)과 그 주변 화가들이 추구했던 환상성은 현대미술의 전개에 새로운 길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르 누보에 대한 관심은 파리의 초현실주의* 그룹과 1936년 발간된 펩스너Nicolas Pevsner(1902~1983)의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발터 그로피우스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운동의 선구자들》에 의해 다시 환기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후에도 취리히에서 열린 <아르 누보 전시회>(1952),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린 <빅토리아 시대 및 에드워드 시대의 장식미술 전람회>(1952~1953),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아르 누보 전람회>(1960) 등 여러 전시를 통해 관심이 지속되었다. 아르 누보 양식의 특성과 역사 등에 대한 연구는 슈무츨러Robert Schmutzler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 양식의 주된 테마를 ‘해초나 식물의 넝쿨 따위를 연상시키는 길고 감각적이며 유연한 선’으로 규정하였다.

아르 데코

아르 데코 Art Déco(프)

유럽과 미국에서 1920~1930년대에 유행했던 미술 양식. 장식미술*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1925년 파리의 <현대장식 산업미술국제박람회Exposition des Arts Décoratifs> 의 약칭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때문에 ‘1925년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아르 데코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구 여러 나라에서 꽃피웠던, 후기 아르 누보*에서 바우하우스*적 디자인이 확립되기 전까지의 중간적인 장식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주로 비엔나 공방*, 입체주의*, 러시아 발레단, 미국 인디언의 미술 등에서 착상을 얻었으며, 유동적인 곡선을 애용했던 아르 누보와는 대조적으로 직선, 기본적인 형태의 반복, 동심원 등 기하학적인 문양을 선호하였다. 처음에는 상아나 옥 등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을 사용하면서 수공예 중심의 일품(一品) 제작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경향을 띠었으나, 부분적으로는 경제공황의 영향을 받아 대량생산이 가능한 경제적인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르 브뤼

아르 브뤼 Art Brut(프)

세련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를 지닌 미술로, ‘원생미술(原生美術)’로 번역된다. 프랑스의 화가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가 1945년에 만들어낸 용어로서, 아마추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종의 순수한 미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뒤뷔페는 어린이나 정신병자 또는 소박한 미술가 등 교양이나 전통적 미술에 거의 영향받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고도로 훈련되고 의도적인 직업 화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솔직하고 창조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특성을 하나의 기법으로서 도입하였다. ‘날 것 그대로의’ ‘다듬지 않은’ ‘야만적인’등의 뜻을 갖는 ‘brut’라는 말은 서구적인 ‘지(知)’가 배제되거나 그것에 길들여짐을 거부하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의해 창조된 산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 브뤼는 처음에는 반교양주의적, 반문화적, 반예술적인 입장을 가리켰으나 후에는 종말에 달한 서구의 지적 풍토를 재생시키기 위한 기폭제로서 인정되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정신병리학적인 관심들, 즉 1907년 레자Marcel Réja(의사 뫼니에Paul Meunier의 가명)가 출간한 《정신병자들의 미술l’ Art chez les fous》, 의사인 모르겐탈러Morgenthaler의 미친 작가 뵐플리Adolf Wölfli에 대한 1922년의 연구, 프린츠호른Hans Prinzhorn의 《정신병자의 조각품Bildnerei der Geisteskranken》과 《광기의 표현Expressions de la folie》(1922), 잡지 《미노토르Minotaure》에 실린 아프리카 미술 및 영매적 작품들과 유사한 ‘원생적인’ 사진들과 같은 것이 그 선례가 된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뒤뷔페는 정신병자, 어린이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이들의 그림을 계통적으로 수집하여 1947년에 드루엥Drouin 화랑에서 전시를 열었고, 1948년에는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 타피에Michel Tapié, 포랭Jean Louis Forain(1852~1931) 등과 함께 협회를 설립했다. 비전문가들의 작품이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안 뒤뷔페는 진흙, 아스팔트, 유리조각 같은 특이한 재료와 긁거나 베어내는 기법, 거칠면서도 표현적인 드로잉 양식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역설적으로 ‘아르 브뤼’라는 용어는 그의 작품 중 ‘나이브 미술*’과는 거리가 먼 양식의 작품에 사용되었다. 뒤뷔페는 아르 브뤼에 대한 많은 강연을 하였으며, 특히 1951년 시카고 예술클럽에서의 강연은 시카고 이미지즘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67년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수집한 작품들 중 700여 점을 전시하였고, 1976년에는 스위스 로잔, 샤토 드 보리유Château de Beaulieu에 아르 브뤼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다. 또 “나의 화면에는 색채나 명도, 그리고 광채, 질감의 변화도 없이 단지 모든 종류의 표지(標識), 마티에르*를 겁내는 손의 생생한 궤적이나 자국만이 나타나 있다. 나는 구석구석까지 모노크롬*의 진흙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듯한 그림을 꿈꾼다”는 그의 반회화적인 관념은 타피에의 앵포르멜* 이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르 오트르

아르 오트르 Art Autre(프)

이 용어는 타피에Michel Tapié의 저서 《아르 오트르Un Art Autre》(1952)에서 비롯되었고, ‘autre’란 말은 《또 다른 형태론Morphologie Autre》(1960)에서도 사용되었다. ‘아르 오트르’는 사실상 앵포르멜 미술* 또는 타시슴* 등과 유사하게 쓰이고 있으나, 기하학적인 양식의 미술과는 다른 표현적인 미술형식의 새로운 개념의 근원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해주는 용어이다. 타피에는 다다*와 제2차세계대전의 경험은 모든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관념들을 불신하는 일종의 백지상태를 초래하였고, 모든 관습적이고 미학적인 규범에 반대하는 ‘또 다른’ 예술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표현적이고 비기하학적인 추상은 실재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소통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가 양식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거부했다 할지라도, 아르 오트르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해 준 실존주의적 언어의 형식화로서 물질과 제스처가 아르 오트르의 미학을 규정하는 새로운 요소가 된 것이 사실이며, 개념상의 모호함은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 아르퉁Hans Hartung(1904~1989), 볼스Wols(1913~1951), 마티유Georges Mathieu(1921~ ),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마타Roberto Matta(1911~ ) 등 그가 다소 확실한 기준 없이 선정한 대표작가들과 작품에서 드러난다.

→ ‘앵포르멜 미술’ ‘서정추상’ 참조

아르슈지(紙)

아르슈지(紙) arches(프)

프랑스제 수채화 종이. 여러 종류가 있으며, 부드럽고 흡수성이 좋아 붓의 촉감이 잘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아르슈는 보주 지방의 도시이름이며 15세기경부터 제지 산업이 시작된 곳이다.

아르카익 미술

아르카익 미술 Archaic Art(영)

‘고식의’ ‘더 낡은’ ‘태초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르카이오스(archaios)’에서 유래됐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네스크* 미술 등에서 발전의 초기 단계를 이루는 생경하고 미숙한 표현양식을 가리키기도 하나, 특히 기원전 8세기말부터 기원전 480년경에 이르는 그리스 초기의 미술을 말한다. 이 시대의 양식은 건축과 회화보다는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조상, 즉 쿠로스*Kouros라 불리는 남자 조상과 코레*Korai라 통칭되는 여자 조상에서 그 특성이 잘 드러난다. 입술 끝을 살짝 위로 향하게 하고 볼을 뾰족이 내민 특유의 표정, 일명 ‘아르카익의 미소‘로 친밀감과 신비함을 준다. 이 상들은 정면성이 강해 조각적인 깊이감은 다소 부족하지만, 단순 직립형에서 유기적인 인체 표현으로, 직선적이고 투박한 옷주름에서 인체를 우아하게 드러내는 부드러운 표현 등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르카익 미술은 그리스 각지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는 파르테논 이전의 신전을 장식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박공군상(牔栱群像) 조각들이 발굴되고 있다. 이 조각들은 기술적으로는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 작품에는 미치지 못하나 꾸밈없고 맑은 정신성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말경부터 그리스 조각은 보다 자유롭고 풍부한 인체의 변화를 지향하게 되어 형태상의 구속이 강한 아르카익 조각의 특성은 사라지게 된다. 미술사에 있어서 이 ‘아르카익’이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성숙기 이전의 치졸하고 미숙한 시기의 양식을 말한다. 즉 아르카익-클래식*-바로크*로 이어지는 양식 전개도식의 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아르카익 양식을 의도적으로 모방한 의고적(擬古的)인 양식을 아르카이즘(Archaism)이라 한다.

아르테 포베라

아르테 포베라 Arte Povera(이)

‘가난한’ ‘빈약한’ 미술이라는 의미이며 이탈리아의 비평가 첼란트Germano Celant가 1967년에 만든 용어로, 대개 지극히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한 삼차원적 미술을 말한다. 모래, 시멘트, 나뭇가지 등 구체적인 사물들을 가능하면 손질을 최소화하여 배치하면서 자연, 초자연, 언어, 역사 등에 대한 작가의 사색과 성찰을 은유적인 이미지를 통해 나타낸다.
아르테 포베라에는 안셀모Giovanni Anselmo, 보에티Alighiero Boetti, 파브로Luciano Pabro, 쿠넬리스Jannis Kounellis, 메르츠Mario Merz(1925~ ), 페노네Giuseppe Penone,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 조리오Gilberto Zorio 등이 참여하였으며, 그 용어는 주로 이탈리아 미술에 국한되어 사용되지만 사실상 보이스Joseph Beuys(1921~1986), 하케Hans Haacke(1936~ ), 헤세Eva Hesse, 모리스Robert Morris(1931~ ) 같은 과정미술* 작가들이나 안드레Carl Andre(1935~ ), 세라Richard Serra(1939~ ) 등의 작업들도 포함시킬 수 있는, 지역성을 뛰어 넘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빈곤한 재료와 수법을 통해서 일면으로는 서구문화로부터 소외된 주변 문화와 빈곤한 제3세계를 대변하는 측면도 있으며, 경쟁과 상업성을 피하면서 관객의 참여를 촉진하려고 한다. 지나친 변형을 가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재료(단련된 납판, 유리, 식물, 천, 바위, 점토 등)는 지배적인 미학적 표준과 문화적인 제도를 붕괴하기 위한 급진적인 실험 도구가 되며, 관람자는 단순히 조립된 오브제에 지나지 않는 형태에 직면함으로써, 개념적인 이해가 아닌 감각적인 방식으로 매스, 힘, 움직임이 이루는 긴장을 인식하게 된다.

아르티장

아르티장 artisan(프)

직인(職人), 장인(匠人)의 뜻으로 미술 작품 제작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예술 작품 제작에 있어서 기술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아티스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창조성이나 독창성이 부족하고 기술적으로 능숙한 솜씨만을 소유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